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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Nov 14. 2016

커쇼 대 범가너

느긋한 야구 관람

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 매형은 인터넷을 찾아보다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일 커쇼 대 범가너 경기 있는데, 보러 갈래? 가자. 예매할게."


'커쇼 대 범가너'라 함은, 류현진의 현소속팀이자 박찬호가 메이저리거로 데뷔했던 LA 다저스와 같은 지구 라이벌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간의 경기중에서도 에이스 투수들이 맞붙는 경기를 말한다. 클레이튼 커쇼는 LA 다저스의 에이스 투수이고, 매디슨 범가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로, 이 두 투수가 맞대결하는 날은 그냥 '커쇼 대 범가너'라고 흔히 부른다.(자이언츠 팬들은 '범가너 대 커쇼'라고 부르겠지만, 고연전, 연고전 같은 것이다.)

(상)매디슨 범가너 / (하)클레이튼 커쇼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MLB 직관을 하게 될 줄이야. 누나 결혼식 참여 차 방문했을 때도 한번 가 보긴 했지만, 내가 1년 만에 다시 다저스 스타디움(LA 다저스 홈구장)을 찾을 줄은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몰랐다.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 절대 이럴 일 없었겠지?' 하며 퇴사를 잘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였던 '42'

내가 경기를 보러 간 날은 우연히도 '재키 로빈슨 데이(Jackey Robinson Day)'였다. 이 날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을 기리는 날로,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들의 등번호가 42번이 되는 날이다. 다인종이 섞여 살고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나라여서 더 의미가 큰 날인 듯싶다. 재키 로빈슨 데이 외에도 로베르토 클레멘테 데이(Roberto Clemente day, 9/16)가 있는데, 이는 사회공헌을 많이 한 선수에게 주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의 후보자를 지정하는 날이다.

주차장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찍은 사진

내가 경기를 보러 갔던 날이 마침 라이벌 에이스 투수전이라 그랬는지 재키 로빈슨 데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차장에 입성하자마자 '아 오늘은 매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들이 가득했다. 다저스 스타디움은 다른 건 몰라도 주차장 크기만큼은 정말 남다르게 느껴졌다.

다저스 스타디움과 주차장

이 어마 무시한 크기의 주차장은 다저스의 또 다른 수입원이기도 했는데, 2015년 기사에 따르면 당일 주차 티켓 구매 시 20달러, 인터넷 사전 구매 시 1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경기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주차장(preferred parking)은 35달러로, 주차비만으로 우리나라 KBO의 입장료를 능가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주차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다저스 팬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LA를 연고로 하는 다른 팀인 LA 에인절스의 주차비는 10달러)

얼핏봐도 만석

입장료 또한 타구단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다저스 경기장을 세 번째로 방문했을 당시(류현진 복귀전) 포수 뒤쪽 1층 끝부분에 자리를 잡았는데, 135달러를 지불했었다. 반면 샌디에고 파드리스의 홈경기를 보러 갔을 땐 비슷한 자리를 85달러에 샀었다. 인기 구단의 경기는 그만큼 비싼 값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싼 값을 내고 왔으면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뽕을 뽑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야구 관람 문화는 매우 평범한 편이었다. 우선 우리나라처럼 홈팀의 응원 단장과 치어리더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응원 문화가 없다. 8회만 되면 앰프를 끄고 진행하는 한화 이글스의 '육성 응원' 같은 정성 어린 응원 또한 없다. 간혹 파도타기 응원이 진행될 뿐, 별다른 조직적인 응원은 없고 순간순간 펼쳐지는 선수들의 플레이에 환호성을 보내거나 전광판에 나오는 문구에 따라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잠시 지르는 정도이다.


이런 조직적인 응원 문화가 없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 우선 미국은 땅이 워낙 넓은 탓에 원정 응원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정 응원단을 꾸려 버스로 단체 이동을 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홈팀을 응원하는 관객이 99% 정도는 돼 보였다. 그러니 굳이 경쟁적으로 목 터져라 응원할 필요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경기장들은 안전그물이 포수 뒤쪽을 빼곤 아예 없다. 그래서 만약 우리나라처럼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이 관중들을 보며 응원에 몰두한다면 파울 타구에 뒤통수를 맞아 실려가는 사람이 이틀에 한번 꼴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에인절스 홈경기 직관 당시. 저런 공을 퉁퉁 튀기며 논다.

마지막으로 조직적인 응원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느긋하게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경기를 보는 게 그들이 더 선호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피스타치오 같은 주전부리를 씹거나 바닷가에서 주로 갖고 노는 비치볼을 퉁퉁 손으로 튀기는 것 정도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구에 대한 열정이 적은 걸까? 일생을 한 팀만 응원하는 문화를 생각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냥 성향인 것 같다. 여행 문화만 봐도 해변가의 의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일광욕에 시간을 쏟는 그들과 전투적으로 10일 만에 4개국을 돌고 오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엔 엄청난 갭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성향을 고려해 볼 때 그들과 우리 나라의 관람 문화는 서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아주 일관성 있는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경기는 생각보다 싱겁게 진행됐다. 에이스 대결이라 엄청난 투수전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 전개를 예상했으나 샌프란시스코 내야진의 연이은 실책 덕분에 범가너가 일찍 강판됐고, 승부 또한 일찍이 결정됐다.


경기가 끝난 후 난 샌프란시스코 팬인 친구에게 범가너가 투구하는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그는 팔 각도만 보고도 '매드범을 보러 간 거냐!'라며 답을 보내왔고 난 이게 마치 나의 일상인 양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어떤 답장을 보낼까 고민을 했다. 사실 고민할 거리도 아니지만.


이렇게 행복에 겨운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에 잠시 빠졌던 나는, 미국인들의 느긋한 야구 관람 문화를 보며 나 또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길, 그리고 그런 환경에 살 수 있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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