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모 Aug 27. 2023

[전시 후기] 길 위에서_에드워드 호퍼



2007년 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벽 위로 쏟아지는 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조금은 독특한 화가였다. 소외된 소재를 화폭에 그려내는 것은 수많은 화가에게서 봐왔지만 벽 위의 빛을 화폭 중앙에 떡하니 배치하다니. 여백의 미를 넘어 여백 자체를 주인공으로 망설임없이 그려낸 화가. 하지만 그 여백이 주는 치유의 기능이 분명했기에 몇 장의 그림만으로도 그는 내 마음속에 좋은 화가로 자리잡았었다.


한때는 거의 매주 보던 미술 전시를 잘 보지 않는 요즘. 친구가 보내온 초대권을 사용하기 위해 마감 하루 전에 서둘러 관람하게 된 그의 그림은 마치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기다려온듯 익숙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자화상과 손 그림을 거쳐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세계는 생각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는데, 이를테면 '길모퉁이, 밤의 그림자, 공원에서의 밤, 발코니, 페리 선착장, 공원 풍경, 도시의 지붕들, 나의 지붕에서'와 같은 그림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일상적'이라는 말을 붙이곤 하는 풍경들보다도 조금 더 일상적인 것들이었기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의 그림을 보며 '에포케'라는 '판단 중지'를 뜻하는 용어가 떠올랐는데 그것이 곧,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즘'과 닿아 있어서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도시가 이룩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대한 풍경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어떠한 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누구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그가 전시의 제목처럼 기나긴 여행을 통해 '길 위에서' 그림을 그렸을 때, 그러니까 어느 바닷가에 놓여 있는 이름 모를 돌을 그렇게도 여러 차례 그린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여행을 이렇게라도 공유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풍경은 '내가 지금 여행을 하고 있구나, 오랜만이다'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번 전시를 통한 깨달음은 그가 남긴 한 문장에 충분히 담겨 있었는데 바로 "삶에는 존재의 전부가 함축되어 있고 예술은 삶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 때문인 걸까 의심해볼 때가 있고, 스스로 현실 세계를 향한 자각을 조금 더 분명히 해야겠다고 다짐할 때도 더러 있는데 그의 한 문장이 내가 종종 머무르는 이상 세계가 삶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면 오랜 시간 머물러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현실 도피 또한 현실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일테니까 원하는 세계로 여행을 다녀와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