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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Mar 11. 2023

흉폭한 채식주의자들 공개방송 후기

2022.3.8

드디어 오늘만을 기다렸다. 작년 11월 부터 듣던 흉폭한 채식주의자들(이하 흉채)가 오늘 공개방송을 한다는 것. 퇴근하자마자 충정로 SAPY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6:45분 차차에서 활동하시는 사랑해님 께서 안내를 도와주셨다. 문을 열자 보이는 차차의 굿즈들과 더불어 베리어 프리를 고려한 장소 섭외며 50명이 들어서도 충분히 수용가능한 공간에서 나무와 배추님 그리고 자막과 영상 및 음향을 담당하는 활동가 분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벅참(!)이 느껴졌다.


흉채를 알게 된 건 작년 11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비건 지향을 실천한 이후로 인스타그램을 넘겨보던 중 우연히 추천 팔로워 중에 ‘흉폭한 채식주의자’ 라는 계정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팟빵으로 흉채를 듣고선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했고 구독하기 시작했다.


흉채는 나무와 배추님을 필두로 게스트 분들이 종종 나와 비건, 동물권, 기후 위기,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다룬다. 나는 흉채를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들야학 선생님, 섭식 장애, 성노동자(주홍빛연대 차차), 동물권 활동가(직접행동, 물결 등) 그리고 <성스러운 동물성애자>에 나오는 주파일 사람들까지.. 우리 사회에 있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몰랐던 세상을 발견했다.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편견을 마주했고, 이상하고, 해괴하고, 난폭해보이고, ‘왜 저럴까?’ 라고 여겨왔던 의문들이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가 그려온 세상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논비건이었던 시절 자주 먹던 버거킹 와퍼를 떠올렸다. 맛을 즐기고 배를 채우고 싶은 욕구 뒤엔 동물의 피가 묻어있음을 잊고 있었다. 탄소 발자국과 환경 오염의 심각성조차 입으로 들어간 순간 분쇄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먹어버리곤 했다. 버거 안에 첨가된 다량의 첨가물을 먹고 몸도 정신 건강도 잃는 건 덤이었다.


홈플러스에서 채소를 샀을 때 어제와 오늘 진열된 채소가 한결같이 싱싱했다. 혹은 비닐 포장되어 매대에 그득 진열되어있었다. 매끈한 색과 질감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덴 약품과 농약이 들어가있을 것이란 생각에 ‘과연 내 입으로 들어갔을 때 안전할 수 있을까?‘ 불안이 서렸다.


퇴근 후 이마트 정육코너를 걷다 시위를 하던 직접행동가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영등포를 걷다가 보이던 성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가부장제 폭력을 떠올렸다. ‘돈이 없다고 그걸 하냐!’ 라는 부정적 시선을 던지던 사람들에게서 성구매자의 직접적인 폭력, 금융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착취와 폭력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다수의 비장애인에 초점을 맞춘 공간은 이동권 뿐만 아니라 공간을 사용할 권리 심지어 문화를 누릴 권리조차 빼앗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질과 누릴 수 있는 폭을 줄여버리는 것이 당연시 여길 수 없는 일이었다.


흉채에서 만난 목소리는 에코처럼 모이더니 내가 일궈온 세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윽고 균열난 세상은 파편이되어 나를 찔렀고 이는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파편을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었던가.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채 찌르고 휘두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파편이 나에게로 향할 땐 그들의 고통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완벽할 수도 그들처럼 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찔려왔던 경험들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흉채는 그런 의미에서 신세계를 안내해 준 곳이었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저항하면서 피흘리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저들을 보라고 내게 말을 건네주었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지 않고 외면받는다는 기분이 들 때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희망을 얻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공개 방송에서 비건을 실천한 학생 사연이며 비건으로 살면서 성분표를 연신 들여다보아야하는 것 그리고 비건을 시작하는 데 겪는 어려움(가정, 애인 간의 관계..)에서 복잡한 마음을 살펴보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희망까진 아닐지라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겠다 싶었다.


내 편이 없어 소외받을 때 혹은 외면할 때 그 끝은 죽음 나아가 절멸일진데 5년 이라는 시간동안 꾸준히 목소리를 낸 그들의 존재 덕에 누군가는 살아있어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서야 목소리를 내는 존재를 알게되어 감사하면서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라는 아쉬움도 공존했다.


나는 이 방송을 들으면서 복잡함을 마주했다. 나의 세계는 새로운 영역을 받아들이기엔 아직도 좁지만 넓히려면 많은 자극이 필요하겠다. 이해의 영역은 얼만큼 넓어질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창구가 되어주고 싶다. 작은 마음이라도 틈을 내어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나무 가지처럼..


44쪽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내가 인간으로서 기억하고 대우함으로써 당신의 인간됨이 지켜지고 획득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도 인간이 된다.’ - 김영옥,류은숙 저 <돌봄과 인권> 중


아침독서로 이 문장이 눈에 밟혔다. 숨만 쉬어도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지만 인간 외의 존재들로도 확장해서 생각해보았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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