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일간 Aug 23. 2024

어려운 것도 쉽게 바꿔야 하는 디자이너는 어렵다.

디자인 이야기

아무리 어려운 것도 쉽게 쓸 수 있게 하는 사람

그게 우리 디자이너일지도.






너무 고민할 요소가 많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프로젝트가 있었다.


UX디자이너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낸 후였다. 그 첫 프로젝트도 혼자서 다 해낸 것이 아니었다. 훌륭한 선배가 옆에서 자주 찾아온 위기마다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처음으로 디자인한 결과물이 세상에 나왔다. 이 상황을 얼마 즐기기도 전에, 다른 과제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신입에 대한 보살핌은 없었다. 그 존경스러운 선배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때, 이게 가능한가 싶은 프로덕트의 요구사항을 받았다. 


지금의 AI와 비교하기 부끄럽지만 나름 AI가 있었고, 사용자는 터치 외의 다른 입력도 가능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입력 방법에 맞게 결과를 전달하는 방식도 달라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그런데 뒷단의 기술은 몇 개의 서버가 함께 동작해야만 사용자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할 수 있었다.


디자인을 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있는 재료를 잘 조합하면 뭐든 못 만들겠는가. 예를 들어, 책상이 필요한데,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장 난 TV와 레고 블록들만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든 조합하면 책상 기능을 할 수 있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책상을 잘 쓸 수 있을 지다. 이 책상을 잘 쓰려면 두 이질적인 재료를 어떻게 잘 연결하였는가가 중요하다. 잘못 연결하면 쓰는데 덜컹거릴 수도, 금방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이 과제는 몇 개의 이질적인 재료가 있어 보였다. 그것도 너무나 다른.




어떤 리뷰 회의였다. 어떨 것 같냐고 조직장이 물었다. 내 첫 소감을 얘기했다.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보다 많이 복잡할 것 같다고. 그러자 조직장이 말했다.


사용자가 볼 수 없는 곳에
엄청 복잡한 로직과 시나리오가 있더라도,

사용자가 생각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잘 쓸 수 있다면,

그건 좋은 디자인이고
디자이너는 그걸 해내는 사람이야.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디자이너란 누구인가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용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떤 복잡한 기술과, 솔루션들과, 플랫폼들이 연결되었는지도 당연히 궁금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고민을 하고 고생을 해서 이것들을 다 붙여놓았는지 알아요?’ 하고 싶지만, ‘누가 하라고 했나요?’ 소리나 들을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곳까지 편안하게 그리고 빨리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상류부터 배를 타고 내려가는데 갑작스럽게 폭포를 만난다거나, 배에서 내려 배를 직접 끌거나, 흐름이 약해 노를 젓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얄미운 손님이다. 그래도 그 얄미운 손님이라도 제발 한 명이라도 더 와줬으면 하지만.  


그래서 어려운 것을 쉽게 보이게 만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 디자이너다. 배를 타고 가는 길에 벽이 있으면 돌아가게 만들고, 지겨울 수 있으니 돌아가는 절벽에 나무와 꽃도 심어 두고, 어쩔 수 없이 잠깐 배를 끌고 가야 한다면 사탕 하나 입에 물려주어야 하는. 그래서 도착했을 때 그 손님이 ‘어, 나 힘들지 않게 올만 했는데?’라고 착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어 보이던 요구사항들은 큰 회의실 화이트보드를 화살표와 다이어그램으로 몇 번 가득 채웠다 비웠다 반복한 후에야 정리가 되었다. 화이트보드의 내용을 컴퓨터 화면으로 가져와 정리하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결국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비스는 개발되었다. 그리고 기대한 것만큼 편안한 유람선은 아니었지만 그 얄미운 손님들이 찾아주었다.




지금은 더 다양한 플랫폼, 솔루션, 서버들이 연동되어 하나의 서비스, 하나의 시나리오가 나온다. 복잡한 누더기가 어쩔 수 없는 시대다.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복잡한 누더기를 디자인하는 것이 좋을 리는 없다. 아무리 잘 연결해도 하나의 나무로 만들어진 심플한 책상보다 아름답기 쉽겠는가? 누더기 디자인이면 아무리 디자인을 잘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적당히 복잡해야지, 너무 복잡한 로직이 뒤에 숨어있다면 개발하는데 비용 대비 효과가 크기 어렵다. 또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그 조직장의 말을 90%만 동의하는 이유다.  


어느 정도 복잡한 선까지 디자인으로 소화 가능한가의 논의는 쉽지 않다. 아마도 요구사항들을 우리들의 두뇌에 입력하고 화이트보드에 몇 번 정리해 본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로직이 너무 어려워 문서화가 어렵다거나 유관부서 이해관계자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면, 그때는 진행해도 될 것인지 분명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적어보니 결국 조건도, 상황도, 사용자도, 제약도 모두 복잡한 상황에서 UX 디자인을 해보라는 말 같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걸 바로 당신이,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젝트 매니저 말고 프로덕트 매니저 하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