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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21.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5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5 순례길과 빈대

 

메세타 고원지대 200킬로를 쉼없이 걸었다. 큰 부상없이 걸어냈다. 누군가는 지루한 길이라고도 했고, 누구는 먼지나는 길이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빨리 걸어버리고 싶은 길이라고도 했다. 내겐 그 어떤 길보다 낯설고, 비현실적인 길이었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고원의 평야 속에서 숨통이 트여지는 길이었다. 육체적인 힘듦이나 갈증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자리에 멈추어지지 않는 그런 길이었다.


레온부터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삼백킬로 남짓이다. 


이제 삼백킬로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삼백킬로나 남았다. 


삼백킬로가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내겐 그것 밖에 남지 않은 길이다. 남은 길을 수월히 걸어낼 거란 자신감에서가 아니고 이미 이 길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게으르게 걷게 되지 않는 길. 애써 속도를 늦추거나 하루에 걸을 거리를 줄이게 되지는 않는다. 수백년 전의 순례자가 그랬듯, 그저 발길이 닿을 수 있는데까지 걷다가 하룻밤을 보내고 또 내가 걸어낼 수 있는만큼 솔직하게 걸어가는 길. 그래서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계속 걷는 수밖에.


남은 일정도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피레네 산맥만큼 높은 산도 넘어야하고, 날씨도 여전히 덥고 뜨겁다. 길 위에서 보낸지 한달, 온몸에 피로가 묵직하게 쌓였다. 이곳 레온에서 하루 푹 쉬면서 짐도 정비하고, 몸도 좀 쉬기로 한다. 깔끔한 호텔을 골라 푹 자고 싶다. 사실 어제 그제 순례자 숙소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빈대


엊그제 하룻밤을 묵었던 Reliegos에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여러 개가 있었다.공립 숙소부터 조금 더 비싼 여러 개의 사설 숙소까지. 난 사설 숙소 중 한 곳에 묵었다. 매우 깨끗해 보였고, 새로 막 문을 열어 시설도 모두 새 것이었다. 숙소를 구할 때 다 돌아다녀보고 구하면 가장 좋겠지만, 워낙 지친 상태로 마을에 도착하기 때문에 그럴 힘이 남아 있지도 않거니와, 다 돌아다녀봤자 큰 차이가 없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을 입구 첫번째 숙소로 정하면, 마을 중심부로부터 너무 멀거나 비싸기도 하다. 그래서 주로 중심부 근처 두세군데를 돌아보고 결정한다. 그 마을에서도 두번째로 들어간 곳이었고 30킬로를 넘게 걸어온 탓에 다른 곳을 더 둘러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튼 침대 배정을 받고 들어간 곳은 3개의 이층 침대가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미 외국인 부부가 창가쪽 침대 아래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매우 깨끗한 시설에, 훌륭한 순례자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푹자고 새벽에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 잠을 깨우지 않으려 로비로 짐을 들고 나와서 챙기는데 침낭 커버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벌레다. 어디선가 본 빈대 사진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니 똑같다. 악~ 빈대다. 순간 휴지로 잡아서 휴지통에 버린 후 급하게 나섰다. 물린 데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영 찜찜해서 어제 빈대에 대해서 자세히 찾아봤다.  산티아고 순례길 각종 블로그와 유럽 배낭 여행 사이트에는 빈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증상

물집이 잡히고 빨간 발진과 함께 엄청나게 가렵다

빈대 독이 온몸에 퍼져 이주 이상 가려움이 극심하다

크게 부어오르고 물린 부위가 아프다

흉터가 남는다

치료

독을 중화시키는 해독제 주사를 맞는다

해독용 약을 이주 이상 복용한다

발진과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는 연고를 바른다


물린 사람들의 사진을 보니 끔찍했다. 한두군데가 아니라 한번 물리면 줄줄이 물리고, 빨갛게 부어오르는 정도가 엄청나다. 순례자길을 걸으면서 빈대에 물리지 않으면 천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빈대가 많다는 말까지…여지껏 빈대를 본적도 없었고 물린적도 없는 내가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한번 물리면 그 빈대가 어디에 숨어있다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옷이나 가방, 소지품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출몰하는데 귀재인데다가, 어떠한 박멸 조치를 취해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알면 알수록 두려워진다. 

벌레 좋아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유독 벌레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심해서 벌레 퇴치를 위한 여러 개의 약을 들고 다닌다. 숙소 침대에 침낭을 깔기 전에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고 몸에도 벌레방지 약을 바른다. 아무리 더워도 긴팔 옷을 입고 자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써왔다. 그래서 아직까지 물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약을 아무리 발라도 소용없었다고 하니 정말 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배낭 커버에서 빈대가 발견되었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그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딘가 자꾸 간지러운 것만 같고 깊은 잠이 들라치면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망상에 휩싸여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레온에서 하루를 더 묵으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빈대 퇴치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물론 없을 확율은 99.9%일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 불안에 떨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남은 300킬로를 걷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깨끗한 숙소라해도 그곳에 머문 누군가의 가방에 빈대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 가방으로 옮겨질 수도 있고, 그 숙소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빈대없는 숙소를 딱히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어제 레온에 도착해서는 다른 숙소를 찾아 돌아다닐 힘도 남지 않아 순례자 숙소에서 묵었다. 오늘 아침 일찍 짐을 챙겨 관광 안내소로 가서 호텔 지도를 받아 깨끗한 호텔을 찾아 나섰다. 물론 별 다섯개 호텔에도 빈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필요한 건 세탁 서비스가 있는 호텔,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소지품을 고온의 물로 세탁하고, 건조기의 뜨거운 열로 말리면 퇴치가 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내가 여지껏 머문 숙소 중에 가장 비싸고 좋은 부띠끄 호텔로 정했다. 햇볕이 잘 드는 환한 방에, 세탁 서비스까지 갖추고 있다. 푹신하고 깔끔한 이불과 침대, 혼자쓰는 럭셔리한 욕실까지.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모든 옷가지와 침낭을 세탁서비스에 맡겼다. 배낭과 신발까지 고온의 물에 담가 빨고. 그렇게 오전부터 오후까지 대여섯시간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했다. 빈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빈대 한마리에 초가삼간 태운다고 했던가. 빈대에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소지품을 다 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퇴치가 어려운 벌레다. 알고 나니 더 신경이 쓰인다. 이제부터는 어디서 자든 맘 편히 자긴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코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코스다. 시간이 충분치 않은 사람들이 마지막 지점 근처에서부터 걷기 시작하기 때문에 순례길 초반보다 산티아고 직전에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러니 빈대가 있을 가능성도 점점 더 커진다. 


새끼손톱 반에 반만한 빈대 한마리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레온의 구시가지를 둘러볼겸 호텔 밖으로 나선다. 뜨거운 태양은 여전히 강렬하고, 구시가지 구석에 그려진 그림도 스페인스럽다. 그 앞을 지나가는 여성과 강아지마저도. 잠시 빈대를 잊고, 나도 정처없이 레온의 구시가지 골목 사이로 걸음을 옮긴다. 

 

 

Distance: 레온 구시가지 
Time for walking:  5:00 pm – 8:00 pm 
Stay: 호텔  
A thing to throw away: 오늘 버린 물건: 안대 (낮잠 잘 때 쓰던 안대와 안대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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