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꽃길이라 쓰고 비포장도로인 현실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
스타트업.
사람들은 이 곳에 서로 다른 기대를, 서로 다른 꿈을 품고 모여든다.
누군가는 혁신적인 제품을
누군가는 도전과 열정을 통한 빠른 성장을
누군가는 스톡옵션과 연봉강화를
누군가는 수평적인 팀문화를
누군가는 자유로운 출퇴근을
누군가는 무제한 간식과 커피를(응?)
중요한 건 스타트업은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와 좁쌀 같은 네트워크를 갖고 처음 시작해, 꽃길이라 쓰고 사실은 비포장도로인 현실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그러다보니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틀 위에서 우리의 아이디어를 고도화 시키고, 우리 회사에 맞는 문화를 하나 둘 찾고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스타트업에는 잘 나가는 기업 못지 않게 실력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잘 나가는 기업이야 짱짱한 복리후생과 돈다발을 흩날리며 인재를 모집하면 그만이지만, 스타트업은 돈다발 뿌렸다가는 그대로 다음달 임대료를 내지 못할 수도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황무지 같은 땅에는 여전히 뛰어난 사람이 모이고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그리고 안으로는 문화가 형성되고, 밖으로는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나는 스타트업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있다면, 스타트업계에 한 번 발을 들인 사람이 쉽게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점과 더불어 실력만 있으면 어떤 배경과 개성을 가지고 있든 존중받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점에 빠져들어서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스타트업 구성원에게는 무지개와 같은 다채로움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은 그 다채로운 환경에 대해 몇 가지 느낀 바를 끼적여보려 한다.
물론, 무책임하게 쓰는 글이니 입사했는데 그런 거 없다며 죽자고 달려들면 곤란하다.
"헤이-요! 왓썹 딜런"
물론 맨정신으로 이렇게 부르는 직원이 많지는 않다. 내가 놀란 건 -님도, 직위도 생략한 채 영어 이름만 부른다는 것. 예로들면-
"딜런, 인사팀에서 공지해줬던 거 같긴 한데 찾아보기 귀찮아서 그런데요."
"..."
혹은
"연봉 올려주세요 딜런"
"..."
어학 연수도, 월스트리트인스티튜트코리아(쓰기도 어렵다)도 다녀본 적 없는 입장에서 적지 않게 놀랐다. 대한민국 땅에서 이처럼 급진적인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우리 회사에 입사하는 신규입사자 열에 일곱은 나와 비슷한 컬쳐쇼크를 겪고 있다는 것.
우리 회사에는 대리-과장-차장님 같은 이름 뒤에 직위를 붙여 부르는 곳에서 오신 분들도 있고
이름 뒤에 -님을 붙여서 부르는 곳에서 오신 분들도 있다.
그래서 영어 호칭이 익숙지 않은 신규입사자는 보통 나를 부를 때 "딜런님" 혹은 "효능 매니저님", "저기요" 등으로 부른다. 물론 드물게 "딜런 매니저님"이라는 영문 모를 조합이 탄생하여 날 당황시키는 경우가 있다. 뭐, 그럴 때면 난 마음 속으로 '큭큭큭...아직 뭘 모르는구만'하며 "'님'자는 뺴세요"라고 젊은 꼰대마냥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최근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높으신 분이 생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딜런님"이라고 부르신다.
...
......
거들먹거리긴 커녕 반대로 "무슨 일이시죠 크리스토퍼님?"이라고 대답할 뻔 했다.
누군가 그분에게 "님 자는 빼세요"라고 말할 거라 기대하며, 그 역할을 떠넘겼으나.
...
......
몇 개월 째 변함이 없다. 우리는 터지지 않는 폭탄을 서로 돌리고 있었다.
이러다 전사적으로 영어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건 아니겠지?
일반적인 스타트업이 그렇듯, 우리 회사에도 복장 관련한 규정은 특별히 없다. 그래서 회사 안에서는 마치 대학교 캠퍼스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캐주얼 스타일, 스트릿 스타일, 여성스러운 스타일, 댄디 스타일, 스포티 스타일 등.
그래서 처음 입사하고 나서는 요일에 따라, 부서에 따라 옷 입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걸 알아가는 것도 일종의 재미였다. 왠지 개발자는 공대생처럼 후드나 캐주얼한 스타일로 입고 다닐 거 같았는데, 실제로 그랬다. 세살 패션 여든까지 가는 거였다.
이밖에, 우리 회사에는 20-30대 직원이 많아서 같은 사람인데도 월요일과 금요일 패션이 완전히 다르다. 사실, 패션을 떠나서 같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 때도 가끔 있다(그래서 가끔 동료 직원인지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월요일은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고시생 같으면서, 금요일만 되면 고시 내던지고 청담 클럽 개척자인 것마냥 화려하고 눈부신 모습을 보여준다. 아아, 월요일과 금요일의 괴리를 처음 목격할 때, 그 충격은 마치 친누나의 집 안 모습과 집 밖 모습만큼이나 컸다.
덕분에 이런 환경에서 몇 년을 일하면 이제 옷매무새만 봐도 어느 부서인지, 오늘 약속이 있는지, 숙취 강도는 어느 정도가 되는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력서 특기란에 '고기 굽기'와 함께 특기로 추가할 예정이다.
우선 우리 회사는 정해진 기간동안 정해진 시간을 채우되, 출근하는 시간과 퇴근하는 시간을 구성원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택하고 있다. 사전에 보고도, 결재도 필요없다.
개인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유연근무제가 웬만한 복리후생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의 일상을 회사생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회사생활을 나의 일상에 맞출 수 있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오전에 은행이나 병원 등을 방문해야 하면 갔다가 출근하면 되고
아침에 잠이 많으면 늦게 출근하면 되고
실연의 아픔을 술로 달랬으면 다음날 기다시피 늦게 출근하면 되고
야근 했으면 늦게 출근하면 되고...그러다 다시 늦게 퇴근하고...그러다 다시 늦게 출근하고...그렇게 야근루프에 빠지면 되고
늦게 출근하는 상사를 보기 싫으면 아침 일찍 출근하면 된다.
이처럼 유연근무제는 자기 생활에 맞게,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누군가는 구성원이 저렇게 미쳐 날뛰는데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까 생각하지만, 제대로 돌아간다.
오히려 일할 땐 미친듯이 하고 있어서 보통 사람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우리 회사가 아직 안 망했겠지.
그밖에 이따금 벌어지는 재밌는 풍경이, 유연근무제가 익숙지 않은 신입사원은 텅 비어 있는 사무실을 보면서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전 10시 반이 되었는데, 사무실이 텅 비어 있으면 그야 놀랄만도하지.
물론 동공지진 시간이 길어지면 발걸음을 집으로 돌릴 수 있기에, 적당한 시점에 어깨를 붙잡고 "유연근무제, 하고 있습니다 ^^*"라며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다. 네가 앞으로 빠져들게 될, 그 유연근무제.
유연근무제가 도입되고 제도로 자리잡을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면, 그건 스타트업 구성원이 모두 자율적으로 일하는 방식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나의 업무 능률이 가장 높은 시간에, 가장 완벽한 결과를 내는 것. 그것이 유연근무제를 제공하는 회사가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기대는 성과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아마 스타트업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많이 기대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건, 스타트업에도 수직적인 체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 유명 기업의 '업무는 수직적, 문화는 수평적'이라는 말처럼, 스타트업이라도 규모가 커지면 업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직적인 체계가 잡히기 마련이다. 전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해주고,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안에서 결정과 책임을 짊어지고, 필요하면 "제가 책임지고 사퇴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는(응?) 존재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트업에서는 수직적인 회사와 달리 구성원이 조금 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일처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지위가 아닌 역량을 기준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만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성원 역시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역량이 뛰어난 사람을 존중한다.
그래서 난, 수평적인 문화를 즐기기 위한 전제조건 어디까지 나 자신이 노력과 능력으로 자기 분야의 실력을 입증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은 동등한 대우, 존경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평적인 문화=좋은 문화'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늘 말한다.
물론 업무 외적인 면에서는 정말 수평적이다. 나이나 연차를 이유로 누군가가 더 존경받고 덜 존경받는 일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회사 규모가 더 커지게 되더라도, 서로의 고생을 알아주는 분위기, 회사와 동료 모두를 배려하며 행동하는 따뜻한 문화가 계속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케바케 아닐까 싶긴 하지만, 보통의 스타트업은 의무적인 회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부장님이 "자네 오늘 뭐하나?"라고 물어보면 그 날 약속을 취소시켜야 하는 상황도 없는 것이다. 물론 노래방에 끌려가는 일도 없고, 집에 안 보내주는 일도 없다.
신규입사자를 환영하거나, 기존 재직자를 위한 송별회를 하거나, 그냥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회식을 가져도 부서에 따라, 사람에 따라 회식 방식도 천차 만별이다. 맛집을 탐방하러 가거나, 카페에서 느긋하게 얘기를 나누는 등...누군가를 위한 회식이 아닌 모두를 위한 회식이기에 회식도 즐거울 수 있는 것 같다.
안녕하세요, 양념나무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제가 재직하면서 느꼈던 인상적인 점들을 늘어놓은 글이 되었네요.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이렇지는 않을테고,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제도와 문화를 하나 둘 만들어가는 건, 제 몫이고 여러분 몫이겠죠.
중요한 건 이런 환경 덕에 업무 외적인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회사생활이라는 게 업무 외적으로도 다양한 스트레스가 있거든요. 그렇기에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스타트업의 가장 큰 매력 아닐까 생각되네요. 누군가는 말하는, 이런 자유로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