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화장대가 필요한가요?
주말이라 여유롭게 일어나서 차 한잔 마시고 나갈 채비를 하면서 메이크업을 간단히 하다가, 나의 작고 귀여운 화장대를 공유해볼까 싶어서 기록으로 남겨본다.
신혼 때부터 나에게는 따로 화장대가 없었다. 8년 전에도 나는 인테리어에 진심이었던 사람이라, 당시 인테리어 좀 한다 하는 젊은이들이 선택했던 무인양품 화장대를 살지 말지 엄청나게 고민을 했지만, 18평짜리 복도식 아파트에 화장대에 내어줄 자리는 없었다. 서랍장 위에 화장품들을 올려두고, 바로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을 화장대 삼아 4년을 지내다 보니, 남편도 나도 굳이 별도의 화장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집이 넓어지고 있어 화장대를 들일 수는 있지만, 화장대 없이 신혼생활을 시작한 우리에게 딱히 메이크업만을 위한 공간을 내어줄 마음의 여유(?)는 없다.
이 집에서는 화장대의 역할을 하던 서랍장이 침실로 들어가게 되면서 처음에는 침실에서 메이크업을 했다. 그런데 나의 모닝 루틴과 맞지 않는 게 바로 느껴졌다. 나는 늘 평일 아침엔 YTN 뉴스를 틀어두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귓등으로나마 들으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적막 속에서 메이크업을 하는 게 왜인지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있던 여분의 수납상자에 나의 화장품들을 모아 거실로 출격.
나의 파우더룸(?)이다. 거실 TV장 위 한켠에 보관하고 있다. 손님이 올 땐 잠시 침실로 대피시키긴 하지만, 사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은 1년에 한두 번 남짓이기 때문에 거의 지박령이라고 보면 됨. 작은 거울과 컴팩트한 화장품 수납 상자, 그리고 다회용 면솜 (아래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화장품을 쌓아두고 쓰는 성격이 아니고, 색조도 딱 한 종류씩 주야장천 사용한다는 패턴을 파악했기 때문에 여러 개가 화장대에 굴러다닐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 섹터별로 한번 꺼내보자.
기초 장군들. 토너, 세럼, 크림, 그리고 다회용 솜.
토너와 크림은 유목민 시즌이라서, 한통을 다 비우면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아 새로운 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한다. 민감성이 아니라 웬만하면 트러블은 나지 않는다. 작은 병은 앰플인데,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단계이지만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구매... (미니멀리스트도 충동구매는 합니다) 잘 쓰고는 있는데 다 쓰면 재구매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기초는 토너-세럼-크림 이면 4계절 모두 충분하다 여겨진다. 습관처럼 쓰고 있는 화장품들을 잘 살펴보면, 효과적인 면에서 존재감이 없는 단계가 분명 있다. 과감하게 심플하게 생략해보기를 추천. 무조건 압축하고 싼 것만 쓰지는 않는다. 나에게 효과가 있는 좋은 제품들만을 픽해서 쓰는 게 핵심. (그런 의미에서 이솝의 파슬리 씨드 세럼... 비싸지만 못 잃어)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환경 보호나 자원 낭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데, 생각 없이 쓰는 일회용품들은 거의 대부분 줄이거나 사용하지 않지만 마지막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일회용 화장솜이었다. 사실 세탁해서 쓰는 것이 번거로울까 봐 걱정되어서 몇 달을 고민하다가 구매했는데, 일회용 솜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사용하고 있다. (거의 1년이 되어가는 듯!) 오히려 피부결 정리나 아주 가벼운 필링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색조 장군들.이라고 하기엔 정말... 단촐하다.
쉐딩 같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웨딩 메이크업 때 정도 받아봤겠지..?), 화려한 색조가 잘 어울리는 얼굴도 아니라 정말 기본만 한다.
선블락, 파데, 쉐도우, 블러셔, 아이라인, 브로우 마스카라, 립 제품. 뷰러는 1년에 1-2번 할까 말까... 20대 때는 웜톤에 어울리는 쉐도우 팔레트도 사보고, 막 립 제품도 섞어 써보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메이크업에 큰 관심이 없고 미술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얼굴에 그림도 잘 못 그린다. 과하면 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심플하게 해 준다. 이 정도만 해줘도 생얼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게 놀라울 뿐. 아, 나는 색조 제품에 거의 투자하지 않는 대신 주기적으로 브로우 왁싱을 받는다. 송승헌 눈썹인지라 몇 주만 관리를 안 해줘도 수풀이 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손재주가 없기 때문에 눈썹 정리를 하다가 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5-6주에 한번 정도 브로우바에 가서 정리를 하는데, 역시 전문가에게 외주를 맡기는 것이 내가 이것저것 도구를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마지막, 기타 등등. 헤어 에센스와 면봉, 바디로션, 그리고 이솝 케이스에 담긴 클렌징 용 올리브 오일. 원래는 클렌징용으로 선물 받은 코코넛 오일을 사용하다가 겨울이니 조금 리치한 올리브유를 써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싱크대에 있던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담아와 얼굴에 실험을 감행(?)했는데, 웬일. 생각보다 너무 순하고 잘 맞아서 겨울 내내 올리브 오일로 클렌징 후 다회용 솜으로 닦아내고, 세안 비누로 2차 세안을 하는 루틴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화장품의 전부이다. 물론 세트로 구매하게 된 제품 등 여분의 기초제품들이 있긴 하지만 화장대에 다 올려두고 사용하지는 않고 찬장 한편에 보관한다. 무조건 하나를 다 비워 공병을 만든 후 새로운 제품을 뜯는 습관을 들이니 화장대가 미니멀하는 효과가 있다.
수납 박스에 넣어두니 가끔 방을 옮겨 메이크업해야 하는 경우에도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그래서 이름을 노마드 파우더룸으로 지어보았음), 청소도 한결 수월하다. 종류가 많지 않으니 TV장 한편에 올려두어도 아주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다는 느낌도 없다. 무엇보다도 수납박스의 사이즈가 정해져 있으니 뭔가를 더 들일 수가 없다.
작은 집에 화장대를 들일까 고민하시는 미니멀리스트들에게 좋은 대안 중 하나가 되길 바라며. 나의 작고 귀여운 노마드 화장대 소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