活着, Lifetimes, 1994
<인생>은 알고 보니 원작이 있는 영화였다. 바로 위화가 쓴 동명의 소설 '인생'이다. 큰 흐름에서는 비슷하지만 내용이 다른 부분도 있고 결말의 분위기도 달랐다. 비극과 해피엔드, 두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조금 다른 듯하다. 우선 총평을 얘기하자면, 세련되지는 않지만 내포하고 있는 텍스트는 나쁘지 않았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안 좋았던 점을 먼저 말하자면 개연성과 디테일의 아쉬움이다. 영화의 처음, 주인공 후꿰이가 아내의 만류에도 화를 내며 도박을 하다가 집을 잃자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는 좋은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 아버지가 도박 때문에 화병으로 죽어버리는 씬 등 일부 장면에서 좀 더 세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개연성을 얻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해는 한다. 영화가 다루는 서사의 시간대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야기는 거시성을 갖게 되고 미시성을 잃게 된다. 또 장편소설을 영화에 압축하다보면 으레 있는 일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걸렸던 점은 대사다. 영화는 충분히 상황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전달할 수 있는 것들조차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일일이 설명하고 전달한다. 그로 인해 대사는 어색해지고,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영화임에도 그러한 과한 친절 때문에 사실감이 바래고 말았다. 아직 중국영화를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이것이 당대중국영화의 특징인지 아니면 그냥 이 영화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인공은 사회적 혼란 속에도 가족들과 함께 계속 살아나간다. 그러다 국공내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주인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국민당에게 끌려가 국민당 군부대에 속하다 국민당이 패하자 공산당 군부대에게 끌려가게 되고, 그 후로는 군에서 나온 뒤로도 계속 공산당으로 살아간다. 주인공, 그리고 당시 중국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공산당이 이겼기 때문에 민중은 인민이 되었다.
주인공은 당의 명령이라면 어떻게든 복종하려고 한다. 아내는 지친 아들을 쉬게 하고 싶었지만 주인공은 당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어떻게든 깨우고 업혀서라도 아들을 보낸다. 또 싫어하는 사람이 보낸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선물이 마오주석의 초상화라면 거절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만큼 공산당은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매끼니 밥도 주고 돈도 나누어줘 모두가 평등한 삶을 살 수 있다는데 그러고 보면 가난한 자들에게는 확실히 매리트 있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거창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민중은 모른다. 주인공은 아들을 업고 걸으며 우리는 부자가 될 거라고 말한다. 공산주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살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민중의 모습은 아닐까. 원제가 活着인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당의 명령을 따르고자 한 선택은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의사들이 전부 감옥에 끌려가는 바람에 젊고 미숙한 여의사들의 손에 출산한 딸을 잃고 만다. 하지만 그 모든 비극 속에서 주인공을 자신을 탓한다. 사회를 탓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은 지금의 중국과도 맞닿아있다. 언젠가 중국친구와도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중국에는 만리방화벽이라는 정보 검열 시스템이 있고, 위챗과 웨이보, 언론 등 모든 것이 검열되고 통제된다. 친구는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 사람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인민에게는 금지되어있다. 당이 두려워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정치와 관련된 콘텐츠는 생산되지 못하며, 당은 사람들이 오락 콘텐츠만 소비해주기를 원한다. 대외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불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용기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미 시스템이 탄탄하게 축조되어 변화가 쉽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아갈 용기라도 내는 것이 개인으로서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약하고 그래서 기댈 곳이 필요하다.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에서 나는 성당에서 올리는 결혼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두 장면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누군가는 종교에 기대고, 누군가는 사상에 기대고, 결국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 어딘가에 속하고 어딘가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은 시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은 ‘살아있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