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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eltist Jun 18. 2023

지아장커 '산하고인'

山河故人, Mountains May Depart, 2015



이 영화는 <소무>의 지아장커(賈樟柯)가 감독인데, 국내에서 지아장커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평론가들의 평이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더없이 훌륭한 걸작으로 치켜세우는가하면 누군가는 영화뿐만 아니라 감독까지 극렬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영화는 소위 문제작이라 할 만하며 충분히 다루어볼 가치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본 지아장커의 영화라고는 <소무>가 전부인데, 그 <소무>도 문제작이라면 나름 문제작이었다. 지아장커의 영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했다. 



검은 고양이는 어디에


1978년부터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이 주장한 흑묘백묘론에 따라 자본주의의 입지는 점차 중국에서 확대되었고, 쥐를 잡는 데 능한 흰 고양이 덕분인지 중국은 지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로 제4차 산업혁명의 선봉에서 분투하고 있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을 인공지능분야에 투자하였고 지금은 미국 다음 가는 인공지능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2030년까지는 미국의 인공지능을 따라잡겠다고 선포하였는데, 설령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중국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중국 사회에 오래전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이들이 있다.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그러했고, 영화계에서는 영화감독들이 그러했다.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제5세대 감독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이머우, 천카이거 등이 있는데 이들이 비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 방식이 직접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받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나타난 은유와 상징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영화의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영화의 세계화에 집착하였고 중국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이후 세대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제6세대 감독들이다. 


6세대 감독들은 중국의 체제와 검열과 거리를 두면서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스스로 창작의 자유를 얻었다.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이들은 중국 내에서는 개봉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하영화라는 호칭이 생겼다. 하지만 이후에는 영화에 대한 해금조치가 일부 풀리기도 하고, 감독들도 중국 내에서 상영 가능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6세대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지아장커다. 


지아장커는 중국에서 상영금지처분을 받은 <소무>로 데뷔하여 대표적인 6세대 감독이 되었다. 적지 않은 상을 받았고 말하자면 화려한 데뷔였다. 처음부터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여과 없이 중국사회를 보여주었고, 특히 이를 위해 비전문배우를 주로 기용하여 영화적인 것 이상의 사실성을 추구한다. 


지아장커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티브를 하나 꼽자면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으로 등장한 자본주의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 산업화 과정의 도시와 인간, 노동자들, 빈부의 양극화, 배금주의, 중국사회의 이면과 현실 등의 다양한 주제를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중국은 현실사회주의를 거쳐 이제는 확실하게 자본주의사회이다. 아직까지 공산주의를 주장하고는 있지만 공산주의의 본질은 흐려진 지 오래다. 말하자면 무늬만 공산주의다. 중국을 경제화하고 국력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자본주의가 쓰이고, 검열하고 통제하고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공산주의가 쓰이고 있다. 계획경제라는 미명하에 당은 선부론으로 미래에 공평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변명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갈수록 양극화되는 빈부격차를 방관하고 있다. 이미 세계 2위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지금이 아니면 그 시기는 대체 언제 올 것인가? 물론 이러한 빈부의 문제는 양날의 검인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으로서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의 문제다. 다만 중국의 경우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모순적인 형태로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고, 이 때문에 중국의 영화감독들이 중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조금 더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산하고인>은 초기 지아장커의 스타일(개인적으로 <소무>부터 2000년대즈음까지를 초기로 구분하고 싶다. 다른 영화들은 보지 않아서 견문으로 대략적으로 나눈 것이다. 이후의 작품 스타일이 변화하는 시점부터를 중기로 하고, 멀지 않은 미래, 아마도 어쩌면 2025년쯤부터는 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과는 다소 다른 영화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멜로라고 규정짓는데 이 영화에서도 결국 중심에 있는 것은 자본주의다. 멜로라고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드라마라고 말하는 게 적확한 듯하다. 


이 영화는 왜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일까? 우선 온라인 평가를 조사해보았다. 해외에서는 메타크리틱에서 메타스코어가 79점(100점 만점), 2016년 베스트 무비 64위에 올랐고, IMDb에서 6.8점(10점 만점), 로튼토마토의 토마토미터가 92점(100점 만점)이다. 씨네21에서는 5.8점(10점 만점), 왓챠에서는 3.4점(5점 만점), 끝으로 네이버에서는 네티즌 점수가 7.39점(10점 만점)이다. 멜로의 요소 때문인지 네티즌과 평론가 모두 여성들의 점수가 더 후하다. 수치를 종합하자면 대중의 반응은 평균치의 보통영화보다 좀 더 괜찮은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보다는 평점이 낮기는 하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점수다. 작품을 수치화해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대략적인 인상을 알아보는 데에는 유용하다. 작품을 점수화해서 매기는 것. 영화업계에 있어서는 꽤나 익숙한 방식이다. 


영화평론가들의 반응이 궁금해 그들이 기고한 글을 읽어봤는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실망했다. 잘 들어맞지도 않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잘 모르면서도 무언가 ‘있어 보이니까’ 추켜세우는 행태는 옳지 않다. 필자는 평소 영화를 고를 때 평론가들의 반응을 참고하고는 했는데 이번 기회에 일부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보고는 조금 회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산하고인행 완행열차 : 천천히 감상하기


자본주의는 필자도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빈부의 대물림과 양극화,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의 이면이 야기하는 인간성의 파괴, 그런 것들을 다루기 위해 소설을 쓴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여러 번 소설로 다룰 예정이다. 또 자본주의로 파생한 문제들을 조금이나 해결할 수 있는 방면으로 창업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그만큼 우리 삶에 밀착해있는 소재다. 


지아장커도 그 모든 작품에서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본주의를 다루어왔다. 이에 대해 필자는 지아장커에게 우려하는 마음이 조금 있다. 너무 한 가지 주제에만 매몰되면 작품관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또한 같은 주제로 비슷한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나가다보면 관성이 생긴다. 그러한 관성은 창작자에게 독이 된다. 창작자는 남들의 작품과 어떻게 하면 다르게 만들까를 고민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들과도, 자기 자신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이번 영화의 변화는 어쩌면 지아장커 스스로도 관성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큰 변화는 영화의 장르적인 변화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멜로적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의 형태로 말이다. 영화 내적으로는 화면 비율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1999년, 2014년, 2025년으로 시간대가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각각 화면비를 다르게 함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1999년의 4:3 비율은 예전 디스플레이가 갖던 비율인데 이를 통해 조금 더 과거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2014년은 16:9 비율은 요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많이 쓰이는 비율로 드라마, 쇼, 다큐 등 방송에 나오는 거의 모든 매체가 사용하는 국제표준비율이 되었다. 2025년에는 2.39:1로 요즘의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 비율이다. 조금 더 미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조금 더 영화적인 비율이기는 하다. 어찌 되었든 가로비가 점점 길어지는 방식으로 형식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형식적 재미로 이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1999년의 도입부는 연출도 옛날 영화 방식이다. 주요인물 세 명과 다른 사람들이 ‘Go West’라는 노래에 맞추어 군무를 추고 기차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1999년의 주요인물은 션타오와 장진셩, 리앙즈다. 친구였던 세 사람의 우정은 삼각관계로 인해 파괴되고, 그 결과로 타오와 진셩이 결혼을 하지만 리앙즈는 마을을 떠난다. 사랑을 잃었다고 고향까지 등지고 외진 곳으로 떠나는 전개가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지기는 했다. 


타오는 왜 진셩을 선택했을까? 타오는 친구로서 셋이 지내는 걸 좋아했다. 두 남자의 호감표시를 인지했음에도 시침을 때고 결정을 유보해왔다. 리앙즈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물로1 타오가 부담스럽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감정을 키워나갔다. 거기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진셩이었다. 진셩은 일방적인 인물이다. 황금만능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부를 획득한 자본가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진셩은 이러한 권력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 이는 나아가 진셩을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리앙즈가 진셩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고 진셩에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이 사뭇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리앙즈가 진셩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먹질 정도인데 진셩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리앙즈는 진셩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렸는데 말이다. 


진셩이 적극적인 구애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부가 가져다주는 심리적인 빈부 차에 있다. 또한 물질이 안겨다주는 풍족함도 타오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기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돈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진셩에게 물질은 유효한 자랑거리가 되었고 타오가 진셩을 선택하는 이러한 양상은 중국 사회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야기로서 통속적이고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지아장커가 이러한 서사를 택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중국 사회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오의 아버지가 진셩을 선택한 타오에게 보내는 씁쓸함은 지아장커가 중국 사회에 보내는 표정인지도 모른다. 



쥐만 잘 잡는 하얀 고양이


타오의 진심이 리앙즈에게로 향해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있다. 타오가 청첩장을 주러 온 날, 리앙즈는 타오에 대한 마음을 접고는2 집앞에 열쇠를 던져버리고 고향을 떠나는데 타오는 그것을 리앙즈가 돌아올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이 장면만으로는 의미부여가 어려울 수 있으나 이후 달러가 타오의 집열쇠를 간직하는 것과 결부시켰을 때 이는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리앙즈의 집을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타오는 가져온 청첩장을 가방에 넣으며 쓰라린 표정을 짓는다. 1999년 에피소드에서 리앙즈와 헤어질 때 타오가 슬퍼하는 장면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타오는 리앙즈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읺지만 타오가 리앙즈에게 인간적으로 더 끌리고 있음은 확실해보인다. 


타오가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리앙즈를 선택했다면 타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2014년의 에피소드를 보면 이를 짐작해볼 법하다. 리앙즈는 줄곧 탄광에서 일해 병을 얻었고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다. 타오는 진셩으로부터 물려받은 주유소의 사장이 되어 물질적으로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리앙즈는 자존심을 무릅쓰고 아내를 통해 타오에게서 돈을 꾼다. 타오는 리앙즈를 구하기 위해 선뜻 돈을 내어준다.3 만약 리앙즈를 선택했다면 돈을 꾸러다니며 남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은 타오였을 것이다. 단편적인 사건들이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만큼은 그렇게 그려진다. 산업화는 노동자들의 목숨값으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행복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는 예고된 불행이고 모두가 실감하고 있기에 타오와 특정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의 방식을 일견 이해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1999년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타오의 출산 시퀀스다. 진셩은 부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아 아들의 이름을 달러로 짓는다. 서부 모티브와의 결합을 위해서라지만 달러는 너무 작위적인 작명이다. 진셩의 당찬 포부로 이들의 미래는 행복할 것만 같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 중 행복한(그렇게 그려지는) 사람들은 없다. 2014년의 주요인물은 리앙즈와 타오, 달러다. 리앙즈는 가난 속에서 병을 앓았고, 타오는 비교적 부유하지만 진셩과 이혼하고 아들과도 따로 살았다. 달러는 아버지와 새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이들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달러는 진셩의 뜻을 따라 호주로 떠나게 된다. 상하이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진셩과 달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서방으로 떠나는데 과연 그곳에는 푸른 하늘과 평화로운 삶이 있을까?




Go west, young man


Go West’는 1979년에 Village People이 부른 노래다. 이 제목은 뉴욕튜리뷴지의 편집자이자 정치인인 호러스 그릴리가 미국의 서부개척 붐 속에서 말한 ‘Go west, young man’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에는 동성애적 코드가 담겨 있는 노래였다. 그러다 1993년 Pet shop boys가 리메이크를 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당시 공산권이 붕괴되던 시기 냉전붕괴의 상징곡처럼 여겨졌으며 곡과 뮤직비디오에는 자유를 느끼러 미국으로 오라는 의미를 다분히 함유하였다. 지아장커는 이 노래를 서부는 성공의 척도로4, 그래서 성공을 위해 서부로 가라고 재해석하여 영화 안에 녹여낸 듯하다. 


타오가 행복이라 믿었던 선택들, 1999년 에피소드에서 진셩을 선택해 결혼한 것과 2014년 에피소드에서 진셩에 의해 달러가 호주로 보내지려 하는 소식을 듣고도 그 길이 달러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 믿고 호주행을 방관하는 두 가지 선택은 2025년에 이르러 결과를 드러낸다. 


2025년 호주에 살고 있는 달러와 진셩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진셩은 아들에게 묶이고 달러는 아버지에게 묶여, 서로가 서로에게 묶인 채 자유가 배제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미국과 달러를 외쳐대며 영어 이름까지 만들었던 진셩은 끝내 미국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호주에 와서 발이 묶이게 되고, 또 호주에 와서는 영어도 못하고 정상적인 삶도 영위하지 못하며 총을 수집하는 것에만 집착한다(여담으로 1999년 에피소드에서 진셩이 탄광 직원에게 총을 구해달라고 말하는 장면은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데, 이는 진셩이 호주에서 총에 집착하는 모습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장면이 뜬금없고 작위적인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호주로 건너온 달러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하지만 정작 모국어인 중국어는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이는 진셩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에도 진셩은 중국어를 못한다고 달러를 나무란다.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가 정한 길에서 일탈을 감행하는 달러는 정체성의 방황을 겪고 있다. 한편 펀양에 홀로 살고 있는 타오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그 누구하고도 만나지 못하며 개만 데리고 홀로 살아간다. 


중국 펀양과 호주 멜버른은 다르면서도 같은 공간이다. 두 지역은 부와 성공이라는 기준에 의해 떠나야 하는 곳과 가야 하는 곳으로 나뉜다. 하지만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들 모두 각자의 상실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질적인 공간들을 하나의 공통적인 속성으로 묶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성이다. 이러한 맥락은 현실 공간과도 일치하여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성공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중국인들, 혹은 이민자들의 삶을 바라보게끔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2025년 에피소드의 마지막이자 영화의 마지막에서 타오는 다시 한 번 Go West의 춤을, 군무가 아닌 독무로 춘다. Go West를 활용한 시작과 끝의 수미상관 구조는 형식적으로는 같을지언정 의미로서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의미변화는 타오의 얼굴에 체화되어 나타나 관객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나와 너와 그의 이야기 : 순차 혹은 순환 또는 반복


정체성의 방황을 겪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달러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엄마를 연상케 하는 미아다. 미아가 엄마에 대해 질문하자 달러는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외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억누른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감정은 미아로 대체되어 발현된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보기에도 미아는 달러의 엄마처럼 보인다. 미아는 달러가 진짜 엄마에 대한 감정을 터뜨릴 수 있는 장치로 작용하고, 달러는 미아와의 잠자리 이후 열쇠에 대해 털어놓으며 엄마에 대한 감정을 쏟아낸다. 이 장면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는지 지아장커는 미아의 목소리를 빌려 하나의 아포리즘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고통을 느껴야 비로소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아.”


이로써 미아의 역할은 끝이 난다. 미아는 엄마와 아들 사이는 바뀌지 않는 거라 말하며 엄마를 찾아가라 권하고 달러를 떠난다. 달러는 자유를 얻게 된다. 


<산하고인>에서는 많은 것들이 비슷하게 또는 다르게 반복된다. 타오와 진셩의 이혼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미아와 남편의 이혼과정이 대신 보여지고, 타오의 만두를 함께 먹는 대상이 리앙즈였다가 달러였다가 종국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고, 문물은 구식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으로, 투명한 미래폰의 형태로 변화한다. ‘이것은 그저 나의 이야기이고, 너 혹은 그 사람의 이야기이이며 새로운 것은 없다.’ 삶은 반복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친숙한 것이라고 미아는 말한다. 




설익은 것들의 향연


지하장커가 이번 영화에서 다룬 영화적 기법들이 내게는 소설적 작법과 비슷하게도 읽혔다. 여러 가지 장치, 상징, 형식, 미장센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분히 소설적이었다. 소설을 써온 사람이기에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빈틈을 많이 발견하기도 했다. 영화적 형식과 의미에 있어서의 성취도 인정하지만 필자로서는 영화텍스트의 무형적 가치, 플롯, 의미화 등에 좀 더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좋았던 부분들도 많았지만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도 다루어보려 한다. 


<산하고인>에는 미처 다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징과 장치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폭죽과 폭탄, 불로 이어지는 장면들, 비행기가 추락하고 그 옆으로 화물트럭이 지나가는 장면과, 잠시 후 화물트럭에서 석탄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 우리에 갇힌 호랑이, 씬의 사이사이 끊임없이 나오는 걷는 장면과 탈 것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 언월도를 들고 걸어가는 파란 운동복의 소년과 관우상에 향을 피우는 리앙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의미화에 실패한 장치들이다. 더군다나 시적인 메타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퍼즐이 다 맞춰지지 않는 것은 퍼즐이 다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막연한 추리를 하게 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다. 반복도 좀 더 신중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반복을 하면 의미가 생기고 관객을 주목하게 한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분별하게 이뤄지면 혼란만 낳게 된다. 


보여주기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대사와 대사, 행동과 행동 등 보여주기를 통해서 관객이 깨닫게 하는 방식은 비교적 세련된 방식이다. 반면에 아포리즘을 제시하여 관객이 깨닫게 하는 방식은 쉬운 방식인데 이것이 남용되면 작품의 존재의의가 사라진다. 


핍진성의 문제도 있다. 많은 상징과 장치에 주목하다보니 일면 핍진성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특히 2025년 미래 에피소드가 심각하다. 하나의 예로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농담을 하면서 달러는 가치가 하락하고 위안화가 상승한다고 얘기하는데 이러한 상황과 달러가 중국어를 잊고 영어만 잘하게 되는 상황이 충돌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서방 세계의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시대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룰 가치가 없었다면 이토록 장문의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설익은 것은 설익은 대로, 부족한 대로의 매력이 있다. 작품의 많은 것들을 지적했지만 어쩌면 영화보다 더 문제인 것은 바로 이 설익은 비평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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