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질문의 답: Hubris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그 누구보다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한 사내의 몰락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금관처럼 ‘만인 위에 뛰어난 인간’이라 추앙 받았던, 또 스스로가 완벽한 인간임을 자처했던 오이디푸스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위치로 추락한 다음에야 인간이 완벽해지는 것은 오만이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우선적 이유는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오이디푸스라도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오만’이다. 신 앞에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신의 권위를 가지려고 하는 그의 성격적 결함은 그를 꼭대기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의 내면에 감춰진 야수적 성질도 그의 결함이라 볼 수 있다.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우발적으로 표출되었던 그의 야수성은 결국 아버지를 죽이는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따르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인간의 결함이 인간의 운명을 형성한 것이다.
인간의 운명의 굴곡을 형성하는 것은 비단 인간의 결함뿐만이 아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 역시 인간의 불완전성을 표상한다. 오이디푸스의 수사에 결정적 역할을 제공한 테베의 목자는 왜 아이를 죽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 마디를 내지른다. “가여워서요!” 만일 인간이 이성에 따라서 합리적으로만 움직이는 동물이라면 목자는 명을 받은 대로 아이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은, 인간의 운명은 그저 허공에 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을 기초로 하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항상 계획과 같을 수 없고 변수를 무시할 수 없다. 테베의 목자가 감정에 휘둘렸기에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삶이 형성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극중 오이디푸스는 극이 진행될수록 가장 이성적인 인간에서 가장 감정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극 초반에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인간으로 존경받던 그는 극 중반에 흉포한 야수성을 드러내고,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반에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가장 ‘인간적’이고 가정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과 더불어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완전성을 추구한다. 완전함을 추구하기에 오이디푸스처럼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한다. 신은 이러한 인간을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옭아맨다. 인간을 옭아맬 만큼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완벽한 신이 인간에 비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완전성을 추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완전성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신이 내린 운명을 거스르려 하는 가운데- 인간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권리를 갖게 된다. 바로 자유의지이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극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운명을, 신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탄에 빠진다. 하지만 더 이상 인간의 의지나 선택이란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비극적 최후 가운데서 그는 ‘선택’을 한다. 바로 눈을 찌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아폴로 신이 그렇게 했소. 그러나 이 눈을 찌른 그 손은 다름아닌 나 자신의 손이었소.” 이러한 자유의지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속성이다. 그리고 인간을 들짐승과 구분해 높은 위치에 둘 수 있는 이유이며, 인간이 오랫동안 유구한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온갖 결함과 감정적 휩쓸림으로 인한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인간을 불완전하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인간의 속성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의 일부라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간들 중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던 오이디푸스는, 신이 내린 당신의 운명과 싸우며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복잡한 이 명제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받아들인 뒤 쓸쓸히 테베를 나서며 낮게 읊조렸을지 모른다. “아! 인간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