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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27. 2022

내가 사랑한 검은색

알랭 바디우의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을 읽고

 바디우는 내게 치욕과 영광을 준 사람이었다.


 처음 바디우를 소개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도 아주 오래전 일이다. 삶이란 곳에 불시착하여 어리둥절한지가 꽤 되다가, 이제는 좀 방향을 잡아봐야 한다는 지각이 생길 즈음이었다. 연단에서 그 젊은 교수는 본인 삶에서 최고의 책이라며, 바디우를 내게 소개했었다. 내용이 무엇인지 잘은 몰라도, 망망(茫茫)하여 아득한 삶에 도움이 될까 하고 바디우를 내게 들였다.


 치욕이었다. 적힌 어떠한 말도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삶이 짧은 탓인지, 글씨는 읽을 수 있었으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황망하였다. 평소에 읽는 일을 게을리한 것도 아닌데도 읽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어 답답하였다. 그렇게 짧고 씁쓸한 만남을 덮고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다.


 바디우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작정이라도 하였는지, 내게 달려들어 무엇이라도 손에 붙들고 싶던 때였다. 때마침 바디우가 옆자리에 있었고, 그 어렵던 때에는 젊은 여교수의 호언에 한 번 더 속아도 나쁠 것이 더 없겠다 싶었다. 다시 그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바디우의 모든 말들이 이해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고, 그때의 나보다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온몸에 스며들듯이 깊숙이 이해되었다. 그 이해와 위로로 무자비한 어려움을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 영광이었다. 그리고 삶을 예찬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다시 바디우를 만났다.


Pierre Soulages, <3 mai 1962>(1962)


 이번에 바디우는 “검은색"에 대한 단상으로, 예전보다는 다소 가볍게 다가왔다. 바디우가 생각하건대, 검은색은 여태껏 대체로 핍박받아왔다. 그것은 비단 바디우가 속한 유럽 사회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속이 시커멓다"는 말의 뜻도 그러하듯,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검은색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녀왔다. 바디우는, 검은색을 향한 편견에 맞서 검은색과 관련한 자신의 추억과 단상을 소개한다.


 검은색을 생각하면, 나는 먼저 내 옷차림을 떠올린다. 지금에야 내 차림새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지만, 아주 어릴 때에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아니, 알았으나 이제 와서 다 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부터 나는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검은색의 이미지 탓인지 아버지는 그런 내게 “도둑놈 같은 옷만 좋아한다"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 검은 옷이 좋았었다. 지금도 역시 그런데, 그 이유는 음식이 묻어도 금방 지워지고 또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이 편리한 것이고, 또 내 몸의 볼품없는 부분도 알아서 감추어 주는 덕이다.


 그리고 시꺼멓게 빛이 사라져 고요한, 유년시절 내 방 천장을 떠올린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그대로인지, 어린 시절부터도 대낮부터 발발거리며 다니는 일이 그리 지긋지긋하였다. 학교를 가고, 또 학원을 가거나 숙제를 하는 일이 어찌나 번거로운지. 괴로운 일과를 끝내고 씻고 누워서 불을 탁하고 끄노라면, 세상 어찌 편하고 아늑한지 말할 수가 없었다. 고요.


 마지막으로 학창 시절에 책상 위의 불빛을 넘보던, 그 검은색의 경계가 떠오른다. 사회가 만든 억지 입시에 고통받은 학생들이 모두 그러하듯, 책과 나와의 씨름에서 나는 꼭 스탠드 불빛을 켜더라도 방 안의 새하얀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어둠이, 검은색이 책 이외의 모든 것을 까맣게 지워주고, 한판 승부로 엎어뜨려야 할 책만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때에 세상은 이 책과 나뿐이었다.


Pierre Soulages, <Outrenoir>(2007)


 이렇게 내 검은색을 모아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검은색은 나에게 해방이었다. 단편소설 <무진기행>으로 한국 문학계를 놀라게 한 김승옥의 다른 소설에서 왜 밤거리에 나오냐는 질문에, 밤거리에 나오면 뭔가가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냐 반문하면서 “그러니까 생(生)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중략) 밤이 됩니다. 난 집에서 거리로 나옵니다. 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낍니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한 이의 말처럼, 검은색과 어둠에서 자유를 나는 만끽한다. 검은색 옷을 꺼내 입으면서 그날의 실수로부터. 검은 방에서 하루의 역경으로부터. 스탠드 밖의 어둠에서 온갖 잡동사니로부터의 해방.


 점심 즈음에 해가 져서, 저녁에도 밤에도 아침에도 해가 뜨지 않는 나라에 있었다. 해는 스치듯 오후에 잠깐 그곳을 들렀다  뿐이었다.  덕에 대부분의 시간을 어둠, 검은색에 파묻혀 지낸 적이 있었다. 그곳에 다른 이방인들은  어둠이 불편하고 두렵다 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짙은 검은색이 오히려 편했다. 질척거리는 만사가 모두  어둠에 스며들어 녹아 없어졌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삶을 헤아리는 일이 좋았다. 괜한 밝은 낮에  아닌 모든 것에 열성을 다하는 것보다.


 오늘도 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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