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날들에 솜사탕처럼 휘감는 몽상과 환상, 자꾸만 새롭게 펼쳐지며 몽유하는 차원들, 그 희뿌연 안갯속에 나무 막대기를 넣어 돌돌 말아 건져낸 형태 없는 기록들. 꿈이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에게 허락된 여름 산책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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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두 번째 걸렸다. 팀에서 8명이나 확진이 나왔다. 나도 별 수 없이 유행에 휩쓸리고 말았다. 밤새 평소와는 다른 오한과 피로감, 사지와 살갗이 해리되는 낯선 감각에 이거구나, 확신이 들었다. 아침에 병원에 들렀다 출근하겠다고 말하고, 오픈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다. 그날 병원으로 걸어가는 것까지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 코로나가 아니면 어떡하지, 이대로 출근해야 하는 거면 어떡하지, 그것은 고통보다 더한 공포였다.
결과는 두 줄.
긴장이 툭 풀렸다.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혼탁한 두통 속에서 정신없이 자다 깨다 했다. 햇빛과 달빛이 번갈아가며 눈꺼풀을 스치고 지나갔겠다. 낮도 밤도 아닌 오로지 내 안의 통증 속에서 평온하였다.
시간이 이렇게도 쉽게 지나갈 수 있다니.
내가 처방받은 수많은 알약들은 며칠분의 해와 달이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았을 때 처음으로 읽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듯한 시.
송찬호, <민들레 꽃씨>
후우 -
후후후후 -
살아온 시간이 흩어지는 것 같다. 잃어버린기억들이 있나보다.
날아갔다.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다.
흩어지기 이전의 것은 꽃이었다는데.
며칠째인지 모를, 낮이다. 하늘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맑다. 북한산 자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한참 동안 바라볼 수 있는건책밖에 없었는데,
진짜일까?
문득,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똑바로 누울 수 조차 없는 굽은 몸을 일으킨다. 걸어야 해. 아파도 걸어야 하지. 걸을 때는 척추를 펴야 하는 거야. 나는 처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는 아이처럼 걷는다. 저기 저 멀리, 배롱나무 꽃들이 내게 속삭인다.
가까이, 더 가까이 와서 봐.
여름 내내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 여름이 그리도 싫다던 나를, 너는 참으로 오래 기다려주었구나.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줄 수 있었니.
고마워…….
산등마루에 걸린 구름이 내게 장난을 친다. 나를 잡아 봐.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날 찾을 수 없을 걸?
위로 위로 걸어 올라간다.
다른 마음 없이, 그저 구름이 좋아서. 구름을 잡으려고.
구름 아이가 느닷없이 힘껏, 또박또박, 최초로, 고백한다.
좋 아 해 !
은행나무 잎들이 종소리처럼 잘랑거렸다.
숲에 들어선다. 굽은 나무 기둥들이 가득한 부드러운 숲. 그들이 척추가 굽은 것이 세상에 너 하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많은 굽은 것들이, 내 곁에 함께 서 있었다.
…….
나를 이렇게나 순하게 만드는 건 시밖에 없었는데.
나무들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다. 마치 눈꺼풀처럼 얇은 풀잎들 위로 반짝이며 윤활하는볕뉘, 혹은 윤슬, 같은 것.
진짜일까?
가까이, 더 가까이, 걸어 들어간다.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그 흰빛을 보기 위해서. 보고 싶어서.
세상에, 내가 본 어떤 종이보다 하얗잖아……
종이는 하얀색이 아니었구나……
천연의 종이 위에 감히, 더 이상 쓸 수 있는 말이 없다. 한 방울의 눈물, 그것으로 모든 것은 오롯하게 전해진다.
돌아오는 길에 쉰 목소리로 꽃들의 이름을 불렀다. 모르는 꽃들을 하나하나 잠깐이나마, 안다는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