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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Dec 09. 2024

"지겨워서 어쩐대."

#일기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여름이랑 겨울 중 뭐가 더 좋아요?"


어떤 질문에 대해 망설임 없이, 더듬거리지 않고 대답한 건 꽤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겨울이요. 그러자 질문자 동다. 그는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동의를 하고 싶었던 걸까. 둘 중 하나라면 전자였으면 좋겠다. 그와 나는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여름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여름 싫음'의 반작용으로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겨울이 좋았다. 여름이 견딜 만하게 더웠더라도 나는 겨울이 좋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물론 좋음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것이 있었던가. 좋고 싫음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못나게도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나는 그저 여름이 싫다고만 말했다. 그래도 영원의 입장에서는 싫음이나 좋음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니, 오히려 비슷하다.





산중 책방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살구나무 잎은 애저녁에 다 떨어졌고, 명자나무 자태도 이제 고달픔을 드러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가까스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가장 오랫동안 윤기를 잃지 않은 것은 초가을까지만 해도 수국이나 배롱나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꽃댕강나무였다.


손님 드문 책방 앞의 낙엽을 쓸고 또 쓸다 보니, 세월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여름날 책방에 홀로 앉아 비가 내리는 하루를 시간대별로 기록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도리 없이 묻게 된다. 나는 잘 살았는가. 답을 알면서도 묻는 것들이 있다. 답으로써 질문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어서 대답이 있는 게 아니라, 대답이 있어서 질문이 있는 경우다. 아닌가. 어쩌면  모든 건 기다림이 벌인 일이려나. 그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먹고사는 일에 꽤 애를 써 온 것 같은데, 그것이 내 본업은 아닌 것만 같다. 약하고 무능한 항심이다. 부족한 사회성으로나마 회사에 적응하며 한 달 한 달 열심히 빚 갚았다. 주말에도 한 시간에 만 원씩 차곡차곡 벌면서 밥값 했다. 은행 밖에는 욕할 데가 없었는데 또 은행 밖에는 기댈 데가 없어서 눈밭에 헛발질길 했단 거, 그깟 건 겨우 비밀 축에도 못 낀다.


책방 앞의 나무가 매주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책 그림자가 하루 중 언제 가장 길어지는지,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그림자를 태양은 언제 낚아채가는지, 나는 안다. 스쳐가는 주말 알바생이지만 어쨌든 그 순간 나는 책방의 주인이었으니까. 나무 한 그루를 지극하게 바라보며 일 년 단위의 시간을 세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안녕하세요, 시간 씨."


이렇게 말하면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시간이, 자신이 시간이 아닌 것처럼, 낯선 우리의 얼굴을 뒤돌아봐줄까?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에서 미시아는 온도계에 '이스크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랍을 열 때면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스크라 씨." (p.72)





-가을에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지 않아도 내 곁에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알기 좋은 계절이란 걸 알았다. 땅 위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근방에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내 시야보다 더 넓은 광각으로 보여준다. 땅에 숲이 있고, 하늘이 있다. 숲길은 그야말로 낙엽으로 어벙벙해졌다. 그러나 길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다.



-눈 내린 뒤 산길을 걸으며 알았다. 햇빛이 더 잘 드는 쪽일수록 땅이 더 빨리 마른다는 것을. 더 깊고 더 어두운 곳은 눈이 그친지 한참 지났는 데도 여전히 축축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그런 것이다.


-아침에 책방 뒤편을 바라보면 찬란하다. 하루 더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상에서 빛을 보았다고, 저녁에 나는 쓸  수 있을 것이다.



-초록, 노랑, 빨강, 이 모든 컬러를 한 몸에 지닌 단풍나무의 내면은 무엇으로 반짝이고 있는 걸까. 나는 나무가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준 컬러들을 한꺼번에 본다. 세상을 향한 이토록 다채로운 보시를.


12월에도 여전히 깊어가는 단풍나무들도 있다. 생각해 보면 저들은 며칠 전 내린 폭설도 이겨낸 아이들이다. 저들이야말로 열매 아닌가.



- 바로 앞에서 커다란 잎이 지나가면, 바람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야. 내가 있잖아."


만약 내가 꽃이라면 풍매화였으면 좋겠. 내 마음 한 귀퉁이를 날개처럼 꼬아놓고 싶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리는 거야.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 거야.


-커다란 잎이, 산책이 끝나는 순간 다시 한번 떨어져 내렸다. 잎이 손바닥 만하다. 그들이 내 여정 시작과 끝에서 박수를 쳐주는 것 같다. 익명의 응원단이 온다. 그래계속 써야 한다.



-11월의 은행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산에도, 도심에도, 동네 출근길에도. 은행나무는 전세계적으로 단 한 종만 남아 있으며, 인류가 멸종하면 함께 멸종할 생물 1순위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은행나무는 그래서 필사적으로, 이토록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걸까. 내가 너를 보고 있듯이,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듯이, 당신도 나에게.


-아주 어릴 때, 아주 작은 화분에서 내 키만큼 자라던 백일홍의 기억이 내 평생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만 서른여섯인 지금, 숲속의 백일홍이 여전히 내 키만큼 자란다. 이 꽃은 언제나 내 어깨 높이까지, 마치 달처럼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 꽃이여, 나와 함께 백일몽을 꾸련. 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나를 따라와 주겠니.



-폭폭, 탐스럽게 쌓인 눈이 밀가루 반죽처럼 잘 발효되어 간다. 겨울이 빚어낸 빵이다. 내가 좋아하는 치아바타 빵! 12월 특별한정판! 얼른 달려가 올리브유에 폭 찍어 한 입 베어 물고 싶다. 달려가는 동안 얀 운동화에는 검은 진흙이 묻어난다. 그렇게 시간도 익어간다. 눈 위에 눈이 쌓이듯이. 기억 위에 기억이. 쌓이는 동시에 녹아가는 것들도 있다. 가령 과거. 가령 미래. 그래도 아직은 겨울이다. 당분간은 쌓일 것이다.


-까치 한 마리가 낙엽밭 위를 한발 한발 밟으며 놀고 있었다. 귀엽다, 라고 생각하며 기척 없이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그 순간 까치는 상수리나무 뒤편으로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귀엽다, 라는 쓸모없는 덧붙임을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무산시켜 버리려는 듯이. 까치가 밟았던 낙엽들이 궁금해져서 나도 그 자리에서 한발 한발 낙엽을 밟아보았다. 과연, 새들이 머물다 간 곳은 실패가 없다.  



-나는 사진가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각도 얼마나 많이 맞닥뜨렸는지! 아무런 노력없이, 그것도 무상으로. 단 한 걸음만 비껴나도 생생함을 잃는 풍경들이 있다. 셔터라도 누르고 싶은 완전한 망각의 순간들. 비록 그 순간에 나도 나의 검은 새와 함께 있진 못했지만 말이다.



-바람 아아아ㅅ이다. 나는 항상 ㅅ이라 썼던 것 같다. 다른 자음으로 바람을 표현해 본다면 무엇일까. ㅎ인 것 같다. 후우우우… 화아아아… 휘이이이…. 다음 걸음. 다시, ㅅ인것 같다. 사사사사바람이 불 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ㅅ들이 단풍 씨앗처럼 날아와서 나뭇잎에 사락사락 걸리는 것 같다. 뭇별처럼 많은 ㅅ들이 나뭇잎에 걸리어 흔들리는 소리. 다음 걸음. 문득 떠오르는 s. 외국인들도 바람의 자음을 s라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바람은 크고 작은 s들이 나뭇가지에 고리처럼 걸리면서 나는 소리이려나.


내 이름에도 ㅅ이 들어가는데. 종이 위에 ㅅ을 쓰면, 바람이 불쑥 말할 것이다. "나야. 내가 있잖아."



-열매들은 장마철에는 검은색이는데 겨울 초입엔 오히려 밝은색이다. 나는 그것들을 본다. 더 예전에 열매들은 여름엔 붉은색, 가을엔 검은색이었다. 밝은 초록밭에서, 검붉은 낙엽밭에서, 들은 현명보색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열매들도 변화한다. 그들에게 우호적인 특정한 날씨가, 그리고 나라는 어떤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아는 것 같다.



-어떤 나무가 자신의 열매를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처럼 방울방울 매달아 놓고 갔다. 플라타너스였다. 포근한 그늘이 거대한 장막처럼 드리우던 자리에서, 나는 한참 동안 서서 해사한 겨울 햇빛을 쐬었다. 순일하고 - 검소한 - 겨울 햇빛.


여름날 멀리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오래된 팽나무인 줄 알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그를 다시 찾아갔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주말의 노동에 한 줄기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버즘나무와 친해져 갔다.



-잎이 완전히 다 떨어지고 나서야 이웃한 두 나무가 연리지였다는 걸 알아챌 때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사이사이로 정교하게 뻗어 있었다. 마치 공중을 떠도는 미약한 꿈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단단한 뿌리나 두꺼운 줄기가 아니라, 연약한 나뭇가지에서부터 하나가 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낙엽들은 앙상한 나무 그림자 위로 내려앉는다. 나무에서 갓 떨어진 나뭇잎들은 아직 자신이 나무의 일부라는 걸 잊지 못한 것 같다. 신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나무 줄기 곁으로 내려앉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도 무엇의 일부인 적 있었던가.



-휘어진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스러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서쪽과 상관없는 서쪽이다. 모든 서쪽들의 서쪽이다. 나도 그쪽을 바라본다.



-법석거리는 낙엽밭 위에 놓여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 저것이다. 저것이 시다. 절대로 쓸 수 없는 것을 쓸어보겠다는 마음. 절대로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보겠다는 마음. 게다가 그 사물들은 얼마간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그다음 생각으로, 구름처럼 흘러간다. 생각이 이런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오직 숲을 걸을 때뿐이다. 걸음의 속도에 맞게 생각도 걸어간다. 전철이나 버스의 속도로는 결코 이런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점심 산책을 끝내고 책방으로 돌아오는 길. 지붕 위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저 지붕 위에서 얼마나 싱싱한 상추가 자라났는지 나는 알고 있지. 가 보지 못한 다른 지붕들 위에도 꽃이며 풀들이 피어났겠지.  파릇한 것들이 다 지붕의 지붕이었지.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때, 누군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쟁그랑, 종소리가 울린다. 어둠이 미세하게 깨어진다. 책방 앞집 할머니. 오랜만이었다. 두 손에 가득, 사탕이며 캐러멜이며를 움켜쥐고, 귤 세 알까지 품에 안고 오셨다.


"버티느라 힘들겠어. 손님이 좀 있어야 시간이 잘 갈 텐데. 지겨워서 어쩐대."


할머니가 가고 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몇 개 까먹었다. 이윽고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 문득 그것이 불시에 받은 마음이란 걸 알았다. 귤 세 알. 힘들겠어. 어쩐대. 나에게 이런 것들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이 나에게 아침 햇살처럼 친절할 때, 나는 조금 운다. 어둠의 균열 사이로 지상의 빛이 스민다. 하루 더 살길 잘했구나. 저녁에는 아침이 불러준 말들을 받아적었다. 조용히 울면서 책방 문을 닫았다.


퇴근길에는 누구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조차 점점 더 모르는 마음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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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어서 일단 올려두는 메모 초고.

사진은 갤럭시 노트9 날것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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