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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Dec 15. 2024

500개의 포춘 쿠키 중에

D-499

2024.12.15. 일. D-499


나에게는 500개의 포춘 쿠키가 있고, 오늘 그중 하나를 까먹었다. 쿠키가 재깍재깍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라는 오븐 에서 달콤하게 구워지는 나의 디저트. 하나가 사라졌다. 누군가 내 것을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까먹은 것이다. 당신의 쿠키는 안녕한가.




책방 알바 중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책을 읽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내려놓고 뉴스를 보다 보니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뉴스에서 계속 마음을 떼어내지 못했다. 연이은 정치 속보에 일비일비했다. 밤이 되어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을 여민다. 앞으로 장기전이 될 텐데, 마음을 더 굳건히 해야겠다.  




당신 병원의 모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도덕적인 태도에 있어서 여기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나쁜데, 도대체 왜 우리는 이곳에 갇혀 있고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 거요? 무슨 논리가 그렇소?

-안톤 체호프, <6호 병동> 中


이 문장을 읽다가 문득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내가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9,860원의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하며 울분에 잠겨있는 동안, 그 자는 무상으로 21,240,000원의 월급을 받고 있겠지. 우리가 밤잠 못 이루고 시린 손 비벼가며 거리에 나서는 동안, 그 자는 보일러비 걱정 없는 따뜻한 공간에서 저 한 몸 빠져나갈 략을 짜고 있겠지. 대체 왜 우리는 추운 거리에 나와 있고 당신은 그렇지 않은 거요? 무슨 논리가 그렇소?

 



기록해 두고 싶은 에피소드 하나.


며칠 전 회사에서의 일이다. 40대 후반의 다른 팀 차장님 한 분이 집 가는 방향이 같아 퇴근길에 차를 태워주셨다. 평소에도 종종 스몰 토크를 나누거나 점심을 먹던 분이었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지만(아마도 요리에 관한 이야기 중), 내가 월급을 받을 때마다 한 번은 소금, 한 번은 참기름, 한 번은 머스타드 소스…… 등을 산다고 말했던 것 같다. 고추장은 아직 순번이 안 돼서 그 요리는 불가능하다고, 여름에 들기름을 사서 오이비빔밥을 해 먹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사치라 참았다고, 김치는 너무 귀한 음식이라서 어쩌다 김치가 생겨도 차마 김치볶음밥은 해먹을 수가 없다고, 이번 달엔 간장을 샀는데 하필 부서 연말 선물로 간장 세트(?)가 나왔다고, 왜 미리 말을 안 해준 거냐고 말이다. 사실 정말 웃자고 한 싱거운 소리였다. (쓰고 보니 진짜 구질구질하긴 하다… 아, 참을성 없이 조잘대는 내 영혼이여)


다음날 아침. 차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래서 가 보니, 종이 가방에 출근 전부터 마트에 들러 온갖 조미료를 잔뜩 사 오셨다. 참기름, 들기름, 소금, 설탕, 간장, 고추장, 햇반, 참치, 스팸…….


"아니 이런 걸 다…… 왜 이렇게 많이 주시는 거예요…… 차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장난스럽게 외치며 뒷걸음으로 총총 물러나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는 거였다.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 붉어진 얼굴을 들켰고, 눈물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세상에서 이런 거 챙겨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엄마도 안 해주는 걸……."


그러자 10살 넘게 차이 나는 후배와 비슷한 나이대의 자취생, 40대의 젊은 엄마 등이 내 얘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침부터 모여 앉아 같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잘 울컥하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오전 내내 업무를 하면서도 종이 가방에 눈길이 이를 때면, 눈물이 몰래 다시 차올랐다. 작은 호의가 내 삶에 기록된 크고 작은 설움들을 일시에 훑고 지나간 것이다.


그분은 평소 명품 사기를 좋아하셔서, 종종 옷이나 구두를 자랑하듯 보여주기도 하셨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나는, 명품인 것 자체를 알아보지 못해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기대했을 말을 해준 적이 없었고, 늘 뒤에서 어물쩍 웃고만 말았다. 사실 나는 책이나 꽃 말고는 현실 세계에서 굉장히 무지한 사람이다. (그것도 내가 아는 것만 알지만.) 하지만 자신의 기호를 자유롭게 즐기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호방함은, 업무 시간에도 울컥할 만큼 고마웠다. 


세상에는 이렇게 호방하면서 세심한 마음도 있구나.


언젠가 나도 여유가 생긴다면, 이 세상의 지치고 외로운 영혼들을 힘껏 안아주고 싶다. 내가 먼저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꼭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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