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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휴일의 장바구니, 초록 주스, 시트러스

D-205

by 세라

시간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내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만나고, 어떤 이들은 해외여행에 나선 추석 홀리데이, 나는 바야흐로 백수의 본업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나와 나의 시간. 이런 날에 나는 나와 잘 지낸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 나는 나와 더 잘 지낸다. 그리하여 하나,


<시간의 장바구니를 채워넣을 오늘의 식재료>

브로콜리, 양파, 당근,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두툼해진 시간을 메고 집으로 돌아와 2시간 동안 재료를 씻고 다듬고 정리했다. 신선한 브로콜리와 윤이 나는 양파를 보고 있자니, 내 몸의 성분도 저렇게 바꾸어 보자는 결심이 자글자글 일어난다.


여름내 나의 정신, 육체, 생활은 진력이 났다. 자취방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벌레가 대량출몰하여 나의 정적을 갉아먹었고, 때맞추어 노후화된 가전제품들이 고장 났지만 집주인은 모른 체했다. 회사에서의 업무와 인간관계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나는 카페인과 알코올, 불면증 속에서 뒤척거리며 매일 밤과 아침, 세상 잡사를 예사롭게 대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 결과, 온몸은 염증으로 뒤덮였고 근육은 마비되었으며 뇌에는 스모그를, 배에는 내장지방을 끼고 살았다. 게다가 L4와 L5사이에서 흘러나온 추간판이 신경을 짓누르는 탓에 만사가 저릿저릿했다. 나는 구구절절한 글을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쓰고, '쓰고 싶은 나'와 '지우고 싶은 나' 사이에서 버거워했다.



그러나 보라, 자연에서 얻은 저 순표정들을! 당근아, 그동안 잠을 못 잤니. 브로콜리야, 무엇이 네 머리를 부글부글 끓게 했던 거야. 오늘은 올리브유 속에서 아삭아삭한 잠에 들자. 어렵던 여름은 지나갔단다. 빨강노랑초록파랑 행복한 꿈을 꾸는 거야.


아무려나,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씻고 다듬고 정리한 것은 다름아닌 내 영혼이었으리라!


서서히, 핏줄 속을 일렁이던 알코올이 증발한다. 달콤쌉쌀한 잠이 뭉근하게 위장을 채운다. 서서히, 어제까지의 나와 작별한다. 서서히…….




알람 없이 일어나 식빵 한 조각과 대추 두 알로 식사를 한다. 오랜만에 <월든>을 재독하고 있다. 책 옆에는 술 대신 차가 놓여 있다. 오후의 우롱차에서 달차근한 밀크 캔디 향기가 퍼진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가, 침대 벽에 기댔다가, 창문 앞에 서 있다가, 온종일 영혼을 쉬폰 커튼처럼 끌고 다니면서 여행자의 기쁨을 만끽한다. 아, 이토록 사각사각한 기분이라니. 오늘은 장바구니 없이 밖으로 나가볼까. 그리하여 둘,


<카메라의 영혼을 적셔줄 오늘의 초록 주스>

개구리밥, 수련, 물상추, 계수나무 이파리.


비가 세상을 온통 초록으로 적셔놓았다. 비가 내리다가 그치는 사이사이, 구름 속을 방랑하는 일은 애초에 나의 본업이었다. 카메라는 언제나 나와 함께 다니는 검은 새. 오, 나의 검은 새여, 여기로 와서 물을 좀 마셔보렴. 개구리밥아, 우리 맛있는 초록 주스를 나누어 마시자. 아아, 맛있다, 아이, 시원해, 너희들이 소곤거림이 여기까지 들렸단다!



는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며 떨어진 살구를 주워 먹고 잘 익은 으름을 따 먹었다. 내 유일한 후회는 지난날의 게으름으로 숲 속의 오디와 산딸을 맛보지 못한 것. 오늘은 계수나무의 캐러멜 향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벌인 척 나비인 척 꽃들의 꽃가루를 제멋대로 옮기고 다닐 테다!


그래요 나, 나는 주워 먹는 거지,

훔쳐 가는 도둑,

해찰 떠는 웃긴 백수,

그래도 마음만은 착해서

나, 잠자는 수련에게 이불을 덮어주었어요, 나,

단풍 씨앗의 날개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걸 모른 척해주었지요.


후우우……


박주가리 솜털 날아가고……


어떤 솜털은 카메라 렌즈 위에 살포시 안착하여 허기진 한 영혼을 감싸 안는다. 사진들은 말해준다. 당신은 불안에 잠긴 회의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순도 높은 열정가라. 당신은 생의 간난과 애상뿐만 아니라 생의 다솜과 신비에 대해서도 쓰게 될 거라고.


그날 밤, 가을비를 맞은 내 영혼은 청신해졌다. 그렇게 지난날의 열띤 추억들도 한 소끔 식는다. 초록 주스를 나눠마신 카메라의 영혼도 물상추처럼 아삭거린다.




아침의 빗소리, 늡늡한 비 내음. 오늘은 어떠한 인간 무리에도 뒤섞이고 싶지 않다. 네, 한 명이요, 잠시 저 좀 지나갈게요, 같은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방울토마토와 어린잎에 레몬 드레싱을 뿌려서 책상 위에 사뿐, 올린다. 오늘의 캔디는 베르가못 차예요. 레몬과 베르가못, 외로운 한 인간을 위해 지구별을 찾아온 시트러스의 요정들이다.


그때 우연히, 천장에서 야상곡이 쏟아진다. 차르르르…… 채소와 과육으로 채워 넣은 나의 육체, 별안간 스르르 풀어진다. 말려있던 찻잎, 풀린다. 스르르르…… 안녕, 나 액체가 되어 음악 속으로 흘러들어가요, 잘 있어요, 아마도 나, 인간이라는 걸 잊어가는 것 같아요…… 아차차, 선율은!


며칠전 정원에서 만난 좀작살나무 열매의 옥구슬 선율! 다닥다닥 맺히는 시간의 선율, 자줏빛으로 차오르는 달의 선율, 무수하게 쏟아지는 별똥별의 선율!



내 안에 남아 있던 무기력도, 무기력 아닌 것도, 모두 액체가 되어 흐른다. 액체는 음악이 된다. 음악은 고독이 된다. 고독은 별빛이 된다. (이것 봐요, 고독이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 나, 물렁물렁한 존재 되어 어디까지 흘러갔더라. 무수한 나들, 내 친구들, 별빛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갔더라.


Tähdet tuikkivat,

핀란드어로 '별이 반짝이다'.


외롬으로 굳어가던 내 존재를 연화시킨 야상곡의 제목이다. 그리하여 셋.


<오늘의 무기력을 녹여준 시트러스의 요정들>

레몬 드레싱, 베르가못 차, 별이 반짝이는 클래식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G3FePgcyhLI

Selim Palmgren , Nocturne in Three Scenes, Op. 72 : I The Stars Are Twinkling
하루, 이틀, 삼일. 혼자서도 추석 연휴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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