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존 매든, 2017
슬로운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단순한 게임은 아니다. 이 게임에서 당신은 한 손으로 체스를 두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카드게임을 해야 한다. 당신 체스판 위 말들은 그들 각자의 체스 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도 다른 한 손엔 카드 패를 쥐고 있다. 로비란 자신의 트럼프 카드로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트럼프 카드에 놀라지 않는 것.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로비에 대한 사뭇 유치한 설명을 도발적이라 할 만한 태도로 소개한다. 이는 스스로 최고라 자부하는 게임에 대한 그녀의 정의이며 이 말과 함께 우리를 그녀의 게임으로 초대한다.
<미스 슬로운>은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만드는 ‘수’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점진적으로 제공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수를 읽는데 동참하도록 만든다. 슬로운 외에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극 초반에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피상적인 게임의 모습, 즉 체스판 위의 모습뿐 이다. 그 후에 영화는 슬로운의 다른 손에 쥐어져 있는 카드의 존재와 그 카드들을 그녀가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밝히며 그녀의 수를 분석할 도구를 우리에게 쥐어준다. 이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슬로운의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게 분석의 대상이 되며 이것은 미리 녹음된 영상인 영화와 관객이 주고받는 간단한 게임으로 발전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관객은 슬로운의 행동들을 통해 그녀가 사석과 공석을 가리지 않고 계산을 거쳐서 발화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말들은 일종의 퀴즈가 된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그녀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녀는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맞는가? 그녀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어디까지인가? 영화는 슬로운을 통해 문제를 내고 관객은 예상을 하며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답을 알려준다.
슬로운과 다른 인물들 사이에, 그리고 그녀와 관객 사이에 지치지 않고 이어지던 일련의 마인드 게임은 국영방송에서 슬로운이 전 로비회사 상사인 펫 코너스(마이클 스털버그)와 벌이는 토론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생중계를 보는 슬로운의 팀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토론에서 실수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녀의 발언이 점점 갈 곳을 잃고 관객들이 그녀가 정말 위기를 맞은 것인지 고민하던 찰나에 영화는 슬로운이 에스미(구구 바샤-로)라는 트럼프 카드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반전을 이룬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민감하며 에스미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실행된 슬로운의 트럼프 카드의 ‘충격’으로 영화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드는데 처음부터 이것을 지켜보던 로돌프 슈미트(마크 스트롱)는 충격을 입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슬로운에게 화를 낸다. “도대체 당신은 정상이었던 적이 있었어?”
<미스 슬로운>은 총기규제를 강화하려는 법안을 두고 갈등하는 두 그룹의 충돌을 그린다. 하지만 정작 총기규제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 다뤄질 뿐이며 이마저도 깊이 있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나마 총기규제법에 관련된 ‘논지’들이라 할 만한 이야기들은 앞서 언급했던 코너스와 슬로운의 토론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사유되지 못한 체 슬로운의 트럼프 카드가 등장하기 전 긴장을 형성하는 발판으로서 사용된다.
<미스 슬로운>은 총기규제가 게임의 고정 변수이자 환경일 뿐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드러낸다. 사람들을 위한 법에 대한 싸움에서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으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변수이자 승리하기 위해 이용되는 무기이다. 이처럼 갈등의 주제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현실의 사람들은 이 게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돈과 자리를 지키려는 자들을 위한 게임으로 상황은 전락한다. <미스 슬로운>은 누군가의 게임으로 전락한 이 상황 자체에 집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슬로운은 이 게임에 최적화된 인간이다. 슈미트가 슬로운에게 외치는 “도대체 정상이었던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거부감 없이 관전할 수 있는 이런 게임을 발명한 사회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미스 슬로운>의 결말 부분은 다소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슬로운을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영화는 급격히 무게를 잡으며 그녀의 마지막 트럼프 카드를 밝힌다. 플래시백을 통해 슬로운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그 판타지스러움 만큼이나 촌스럽지만 다행히(?) <미스 슬로운>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진 않는다. 누군가는 놀라움에 환호성을 지르고 누군가는 좌절하는 순간에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슈미트와 슬로운이다.
극적인 승리를 쟁취한 뒤 위증으로 감옥에 들어간 슬로운에게 변호사는 어디까지가 계획이었고 진심이었는지 묻는다. 슬로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찌 됐건 통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슬로운은 선을 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지만 승리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게임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이 있지만 그녀의 승리는 현실의 삶들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게임과 현실을 가르는 선은 모호해져 버렸다. 영화는 당신의 생각을 묻는 듯 감옥을 나서는 슬로운을 비춘다.
+ 모든 걸 떠나서 <미스 슬로운>은 놀랍도록 여유로운 태도로 넋 놓고 보게 되는 연기를 선보이는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배우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