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2015
상대방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어떤 행위일까. 상대방이 내보이고자 하는 감정을, 감추려고 하는 감정을, 혹은 어쩔 수 없이 나타나버리는 감정을, 표정이라는 인간의 외부적인, 변화된 이미지를 보고 인지하는 것이라고 그 기능을 단순하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극 중 인물을 그리는 배우에게 표정이란, 그리고 그것을 보고 읽어내는 관객에게 표정이란 극에서, 그리고 극을 읽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일까. 배우는 극 속 인물의 감정을 표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관객에게 보인다. 그리고 관객은 이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짐작하고 , 상황을 인지하고, 나아가 극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의 서영(장리우)은 표정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표정의 변화를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관되지만 결코 평온하지 않은, 굉장히 불편하고 고집스러운 그 하나의 얼굴을 서영은 유지한다. 영화는 표정 없는 얼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선 이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로 굳은 얼굴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얼굴과 더불어 영화가 신경 쓰이도록 만드는 부분은 처한 상황에 연결되어 변화하는 서영의 단어와 발화 방식이다. 서영은 아무런 반응을,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 속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온 몸을 최대한 사용하여 행동한다. 그는 또한 아무런 말이 없다가도 한순간 가장 압축되어있지만 절제되어있지 않은 날카로운 말을 입 밖으로 내려놓는다.
서영이 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 어떠한 행동을 아무런 동요 없이 행할 때.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여러상황 속 서영의 반응, 무반응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가 지금의 상태, 특정 행동에 도달하는 처리 과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거부하는 것 아니면 수용하는 것. 선택지가 있는 듯 처신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선택에 따라오는 결과의 지나친 불균등을, 영화는 굳은 얼굴을 하고 멈춤과 실행하는 서영의 몸을 통해 말한다.
어는 순간부터 그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지 모를 몸은, 수많은 벌을 받으면서 그 행동양식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자기의 것을, 자신을 파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 속에 선택지란 개념은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몸을 가진 인간에겐 선택지가 없다. 서영은 상황을 마주하는 그 표정을 통해서 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순환구조 속에서 숨을 쉰다. 서영은 자신을 구성하거나 구성하기 시작하는 것들의 파괴를 통해 생존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이 모순적인 행위를 통해 그의 삶은 생존에 측면에서 실제로 나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그의 사회는 권장하고 떠밀면서 동시에 비난한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 소용돌이 속에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놓여있는 인물을 바라보기를 선택한다. 360도 팬 해 상황을 돌아본 카메라는 어느 순간 상황에 반응하는 소영과 영준을 본다. 그리고 소영이 보여주는 것은 그 상황에 철저하게 떠밀려서 그 행위가 체화된 인물이다. 그 행위의 영향력을 뼈저리게 이해한 인간이다.
서영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생존 연장에 성공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의 행위를 통해 많이 바뀌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신경 써야 할 것이 줄어든, 숨통이 조금은 트인 자신이 그 자리에 숨을 쉬고 서있다. 그의 얼굴은 그대로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은 얼굴은 아니다. 한 곳을 응시하며 몸을 격렬히 움직이다 멈추는 그의 행위는 온전히 그의 것일까.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동일한 이미지를 이야기로서 변화시키는 화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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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입이 달린 얼굴>에 대해 생각하던 중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서 모두 공장에서 신문을 찍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나온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지만 기계를 동작시키고 뽑아져 나오는 신문들 중 골라 검열하는 행위는 같다.
<더 포스트>에서 해당되는 장면은 추상적인 승리가, 물리적인 물체를 뽑아내는 과정과 그 물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행위를 통해 힘을 가지는 승리로 증명되는 과정이다. 신문사 고위 관계자들의 선택에 의해 찍히게 되는 활자들은 언론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는 신념이며 기계의 작동을 통해 뽑아져 나온 신문 뭉치는 그러한 의지의 물리적인 힘을,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더 포스트>는 신문을 뽑고 검열하는 노동을 역동적이고 힘차게 그리며 승리의 느낌을 연장시킨다. 그렇게 저들의 승리는 이들의 승리가 되고 우리의 승리가 된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는 ‘좋은’ 가치 속에서 하나의 승리를 할 수 있을까. 저들의 승리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신문을 뽑는 공장의 노동자들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승리감에 취해 그들의 실질적인 존재를, 그들의 삶을 은폐하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