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 2018
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와 그녀의 엄마 매리언(로리 멧카프)은 대학 투어를 마치고 오는 차 안에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부분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린다. 오디오북이 끝나고 레이디 버드가 다른 들을 거리를 찾으려 하자 매리언은 저지하며 “여운에 좀 젖어 있자”고 얘기한다. 레이디 버드는 동부에 위치한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매리언은 집의 경제사정을 얘기하며 어려울 것이라 얘기한다. 매리언이 그녀를 크리스틴이라고 부른다. 레이디 버드는 이에 발끈한다. 둘의 대화가 점점 격양되고 둘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울 즈음 레이디 버드는 달리는 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매리언은 차를 몰고 있고 크리스틴은 그 차에 타고 있다. 매리언은 운전대를 쥐고 있고 크리스틴은 그 옆에 앉아 있다. 레이디 버드는 그 차에서 뛰어내린다. <레이디 버드>는 이 과정과 경험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캘리포니아 주의 새크라멘토. 그곳을 가로지르는 철로의 ‘잘못된 쪽’. 가톨릭 사립학교에 다니는 무신론자. 이는 현재 레이디 버드이자 크리스틴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레이디 버드>는 특정한 말들로 구성된 레이디 버드의 현재 생활을 보이는데 집중한다.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이다. 크리스틴은 남들에게 이 이름을 공고히 선언함으로써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의지를 발산한다. 영화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주변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스스로도 크리스틴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종교, 여성의 신체, 성적인 상황들에 있어서 레이디 버드는 기존의 규제(가톨릭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의 성격도 한몫하는)를 해체하기도 하고 나서서 부정하기도 하지만 기대하고 욕망하기도 한다. 그 말과 행동의 분리의 상황들은 모순적이지만 그런만큼 이러한 묘사는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부유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현실성을 가져온다. 주어졌던 것들이 곧 자신의 것이었던 과거와 진짜 자신의 것을 인식하고 구별하고자 하는 현재. 여전히 존재하는 규율들에 반하는 새롭게 생긴 욕망들. 이 사이에 놓인 고등학생 인간의 행동을 <레이디 버드>는 극적인 사건보다는 건조하게 보여주고자 노력하며 이는 실질적인 삶의 온도와 더욱 큰 공명을 일으킨다.
레이디 버드는 규율과 욕구, 자신을 한계 짓는 것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사이에서 졸업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은 일종의 되돌아오는 구조로 그려진다. 카일(티모시 살라메)과 그와 함께 따라오는 욕망을 위해 이전까지의 태도와 관계를 뒤로하고 나아갔던 레이디 버드는 그의 그룹과 자신의 괴리에서 느낀 허무함에 학교 무도회 날,가장 친한 친구인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에게로 돌아온다. 드디어 성인이 돼서 금지 시 되었던 것들을 체험하고 엄마를 속여서 결국 동부지역의 대학교로 가게 된 레이디 버드는 파티에서 술에 심하게 취해 병원에 가게 되고 다음날 성당을 방문한 뒤 엄마에게 사과 전화를 한다. <레이디 버드>는 이 과정에서 차라는 공간을 많이 사용한다. 차는 엄마 매리언과 있을 때는 갈등의 장소가 되고 카일과 있을 때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되돌아보는 장소가 되며, 운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매리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으로서 역할한다.
<레이디 버드>는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 혹은 우정을 절대적인 긍정의 위치로 올려놓지는 않는다. 줄리는 결국 여름에 오리곤으로 떠나게 되고, 레이디 버드는 집을 떠나 대학으로 떠나게 된다. 레이디 버드가 매리언에게 전화로 메시지를 남길 때, 그녀는 스스로를 크리스틴이라고 얘기한다. 그녀 스스로 지독하게 부정했던, 부모가 자신에게 준 이름으로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은 자신이 벗어나려고 했던, 독립적인 존재로서 존재하려고 했던 의지 자체의 한계성을 인지하고 자신을 구성하는 역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은 불가피한 존재의 연결성을 긍정한다.
+영화는 레이디 버드의 생활을 따라다니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숨 쉬는 저 특정한 시간대의 공간의 모습을 비추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레 소수자를 포함한 당 시대 새크라멘토에 살아가는 삶들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는 소수자를 위하고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얘기하지만 실질적인 산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백인을 제외한 인종과 소수자들을 배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최근엔 다양한 인종과 정체성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에 따라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방식의 메이저 영화들이 등장했다. 다양한 인물들이 산업으로서의 분야 전면에 나서고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 대단하고 가시적인 성과다. 물론 많은 자본이 투자됨에 따라 상업적 성격이 우선시되는 이러한 영화들에 깊이 있는 고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사실은 이들 영화에 존재하는 문제점들과 소수자를 인식하는 방식의 한계에 대해 일종의 면죄부를 제공한다. 인물들은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현실의 존재들의 실제 삶이 배제된 이미지로서 존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영화를 너무나 쉽사리 어떠한 도덕적 지위에 위치시키며 이미지 자체에 대한 성취에 집중하게 만든다.
<레이디 버드>가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은 소수자들을 이미지로서 등장시키고 단순히 최대한 용인하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 축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 그 당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존재들은 단순히 누군가의 시혜적 태도로서 아무 문제없이 스크린에 평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문제들을 품은 체 숨을 쉰다. 우리가 더욱 긍정해야 할 것은 단순한 이미지의 성과보다도 존재들이 실제 했던 역사 속에서의 위치를 통해 그 실질적 삶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