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피셔, 헝거게임:캐칭 파이어, 오역이 가득할 수 있는 번역
https://k-punk.org/remember-who-the-enemy-is/
마크 피셔 자신의 블로그에 2013년 11월 25일에 올라간, 헝거게임:캐칭 파이어에 대한 글. 에 대한 번역을 해 보았다.
적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헝거게임:캐칭 파이어의 개봉 시점은 굉장히 기이하고 묘한 구석이 있어서 충격적이게 느껴질 정도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영국에선, 현 지배 체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감각이 부유해왔다.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임박했다는 그 느낌 말이다. 우울한 감각의 잠에서 깨어나는 움직임, 그리고 헝거게임:캐칭 파이어는 그 자각과 단순히 공명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강화하고 있다. 상품의 심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는가? 그렇다. 그리고 하나의 불씨는 더 많은 불씨를 퍼뜨린다.
나는 ‘섬망’이라는 단어를 과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난주의 헝거게임:캐칭 파이어를 본 일은 진정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경험이었다. 영화를 보며 나는 몇 번이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보고 있을 수 있지? 이런 영화가 이 사회에서 허락될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 수잔 콜린즈의 작품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들 중 하나는 후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가치의 가난하고, 편협하고, 퇴폐한 면모를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우리를 점유하는 방법은 쾌락적 보수주의를 통해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의견을 표할 수 있고(그리고 당신의 그 트윗을 티비에서 누군가가 읽어 내려감으로써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될 것이다.), 원하는 만큼 포르노를 볼 수 있으나, 정작 우리 스스로의 삶을 제어하는 능력은 최소한도로 축소되어 있다. 자본은 우리의 생산활동만큼이나 기쁨과 꿈을 포함한 모든 곳에 침투해 있다. 우리는 처음엔 화려한 미디어 서커스에 중독된 상태로 매료되어 있다가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스톰트루퍼를 닮은 경찰들에 의해 진압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내보내는 티비 화면은 경찰들이 총을 쏘기 직전에 전파가 끊긴다.
이데올로기는 아이디어의 집합이라기 보단 서사에 가깝다. 그리고 수잔 콜린스는 자본주의적 현실주의의 반대 담론을 만들어 냈기에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자본주의적 점유를 분석하려 한 21세기의 시도들 - The Wire(더 와이어), The Thick of It(더 씩 오브 잇), Capitalist Realism(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의 저서) - 은 부정적 내재성을 제시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본주의적 현실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사유, 현 체제의 폐쇄성(변화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마비적인 감각만을 낳을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콜린스는 그런 우리에게 돌파구를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과정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 혁명적 전사이자 여성인 캣니스를 소개한다.
식량을 위해 아이를 팔아넘겨라.
신화가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의 범주는 그 내용의 중요성에 결부되어 있다. 영 어덜트 디스토피아는, 2008년 이후 밀려나고 버려진 세대가 마주하고 있는 삶을 제대로 된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 말하기 어려운 만큼이나 문학적 장르라고 말하기 힘들다. 자본은 - 이제 통치를 위해 신자유주의적(neoliberal)인 방식 대신 허무적 자유주의(nihiliberal) 방식을 사용하는 - 젊은이들을 빚과 불안정성에 내모는 것 이외에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미래는 사라졌지만 현실주의적 자본주의의 메시지는 계속된다: 이것 외에 대안은 없어, 미안.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 너희의 상황(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은 어쩔 수 없네. 그건 그냥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야, 알겠지? 콜린스의 소설의 주 독자층은 청소년과 여성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 하나의 기숙학교 판타지나 뱀파이어 로맨스를 제공하는 대신 콜린스는 - 조용히 하지만 담대하게 -그들을 혁명가로 키워내고 있다.
헝거게임의 가장 놀라운 점은 작품이 혁명을 필요 불가결한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방식에 있다. 쟁점은 ‘어떻게?’(방식적인)이지, ‘왜?’(도덕적인)가 아니다. 그리고 서사 속 주된 고민은 단순히, 그래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혁명을 이룰 수 있는가이지, 그것이 이루어져야 할 마땅한 것인지가 대한 것이 아니다. 적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 메시지이자, 외침이자, 스크린을 통해 우리를 향하는 윤리적 요구... 오직 계급적 자각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집단을 향한...(콜린스가 이룩한 것은 계급, 젠더, 인종, 식민지배의 가치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에 대한 교차적인 분석과 해석뿐 아니라 - Vampire’s Castle에서 나타난 경견 한 체하는 학문적인 견해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신화 예술적 중심에서 이루어진 - 더 많은 사유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요구가 아닌,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외치는 선동적 부르짖음이다.)
헝거게임:캐칭 파이어에는 오랫동안 문화 콘텐츠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펑크적 내재성-전염적이고 자기 반영적인, 영화에서 피처럼 뿜어져 나와 그것을 가두고 있는 상품 문화를 부식시키는-이 존재한다. 영화에 대한 광고는 마치 실제 헝거게임 영화 속에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공허한 자기 언급의 경우와는 다르게도 이것은 우리 사회의 실재를 해석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갑자기 자본의 홍보성 짙은 cyber blitz(새로운 전쟁 무기나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실시하는 훈련)의 음울한 광택은 부자연스러운 것들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우리를 부를 때 우리는 그 부름을 통해 영화의 세계로 이동한다. 다만 영화 속 그 세계는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계’인 것으로 밝혀진다. 불필요한 배경이 사라져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자 확인해보자: 네오로만, 사이버고스한 스타일의 폭력성(야만), 그것을 감싸고 있는 부자들의 야단스러운 색의 화장과 코스튬 같은 복장들, 그리고 빈곤층에게 부과된 고강도의 노동. 빈공층에게는 수도의 프로파간다 방송을 계속해서 수신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만이 제공될 뿐이다. 리얼리티 쇼를 이용한 통제 - 지배층의 오락을 위해 강제된, 하위 계급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는, 경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며 대중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벤트.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대중 매체의 양면적인 역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콜린스가 내비치는 비전에서 보다 핵심적이고 세련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캣니스가 저항의 상징(토템)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캐피톨을 향해 직접적으로 저항의 액션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다. - 실제로 그녀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런 종류의 액션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매체 속에서 형성된 그녀의 위치가, 분화되어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캣니스의 역할은 상징적이다, 하지만 - 세계를 구성하는 점유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상징적이기 때문에 - 그 상징적인 역할이 그녀를 효과적인 기폭제로 만든다. 화염을 두른 소녀... 그리고 불씨는 더 큰 불씨를 퍼뜨린다... 그녀의 화살은 결국에는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어떤 개인이 아닌, 실재 구조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
콜린스의 세계관에서 자본주의적 가상공간을 제거하고 보면 주의를 분산시키는 웹 2.0의 시스템(사용자의 참여가 웹상의 광경에 대한 해독제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장시킴으로써 더욱 만연하고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을 벗어나 어떻게 TV가, 아니, 좀 더 정확히 알렉스 윌리엄스가 ‘유니버설 타블로이드’라고 부른 매체가,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이미지를 생산해내는데 어떤 방식으로 아직까지 유효한지 보여준다.(웹 2.0의 수평주의적 미사여구를 위해서는, 그저 트위터에서 무엇이 트렌딩 중인지 확인하면 된다: TV 프로그램들에 대한 말들이 가장 많다.) 유니버설 타블로이드 속에는 우리를 위한 영웅과 악당의 역할이- 혹은 영웅에서 악당으로 변해가는 스토리가 - 준비되어 있다. 플루타르크 해븐스비가 효율적으로 묘사하는, 캐피톨이 독재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미디어가 가진 힘의 당근과 채찍성 본질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할 정도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폭력을 더 보여준 다음, 그녀(캣니스)의 결혼식이 어떨 것인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다음엔 사람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 그녀의 웨딩 케이크가 어떨지 보여주는 겁니다...”
Unemployed Negativity(블로그)가 첫 번째 영화(헝거게임:판엠의 불꽃)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헝거게임의 참여자들은 단순히 다른 참여자들을 죽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목할 만한 페르소나와 서사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높은 확률로 자신들의 승리에 돈을 건 이들로부터의 도움을 보장받을 수 있다. 헝거게임 참여자들은 경기장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출연자들처럼 화장을 받고 인터뷰를 받는다. 이 인터뷰를 통해 관객의 지지를 얻는 것은 그들의 생존(생사)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각 구역에서 헝거게임에 바쳐진 참여자들이 TV를 위해 정의된 자신들의 고기 인형 역할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 것이 첫 번째 영화의 쟁점이다. 내가 이 쟁점에 대해 글을 쓰고자 했을 때 나는 먼저 비포(프랑코 베라르디)가 했던 말들을 찾아보았다. “자살은 이 시대의 결단적인 운동법 중 하나이다.” 비포는 자신의 저서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에서 이렇게 말했다. 캣니스와 피타의, 함께 독 열매를 먹음으로써 목숨을 끊겠다는 협박은 헝거게임의 규칙 아래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불복종의 수단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이 협박이 저항의 형태가 아니라, 불복종의 형태라는 것이다. 통제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가인 윌리엄 S. 버로스와 미셀 푸코는 저항이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되지 못함을 알아보았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권력은 저항을 필요로 한다. 저항하려는 반대급부가 존재하지 않는 다면 권력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힘을 가할 수 있는 존재(생명)가 없다면 권력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릴 죽인다면,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그들 아래에 예속시킬 수 없다. 권력 앞에서 낑낑대며 살아가는 존재로 축소시키는 것, 그것이 권력이 가진 힘의 한계다. 그것을 넘어서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고로 이미 죽음에 도달해 있음을 받아들일 때, 존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캣니스가 혁명가의 길에 내디딘 결단적 발걸음이다. 그녀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 - 혹은 예속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 을 되찾는다.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헝거게임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감정적인 층위는 작품의 서사에서 부수적인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콜린스의 소설은 - 영화도 소설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따르는데 - 통제 사회가 정서적 기생과 감정적 구속을 이용해 어떻게 기능하는지 잘 이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캣니스는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헝거게임에 자원하고 가족이 위험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캐피톨의 규칙을 따르려고 한다. 헝거게임 소설과 영화를 영향력 있게 만드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리얼리티 TV와 눈물을 자아내는 광고, 그리고 아침 드라마가 만들어낸 상호 정서적인 체제를 넘어서는 데 있다. 제니퍼 로렌스가 보여주는 연기의 위대한 점은 부분적으로 그녀가 감정 - 분노, 공포, 음울한 다짐 - 을 내보이는 데 있어서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층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데 있다.
개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물러설 수 있는 사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이미치는 피타와 캣니스에게 절대로 그들이 지금 올라 있는 열차(캐피톨과 각 구역을 가로지르는 이동수단)에서 내리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 그들이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연기를 하는 것뿐이지만, 무대에서 내려 올 방법은 없다.
캐피톨이 끝까지 추적해 오지 않을, 도망칠 수 있는 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탈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도망자들의 가족을 해할 것이다.
캐피톨이 무너뜨리지 못할 임시 자치 구역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이 캐피톨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캣니스 그녀 스스로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가 되고 싶어 한다.
bring me my bow, of buring gold. 뜨거운 황금이 흐르는 내 활을 가져오라.(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등장하는 구절)
캣니스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 적당한 때가 오게 되면 - 현실 체제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인공의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깨어난다.
그리고
혁명의 시작이다...
마크 피셔의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본 헝거게임:캐칭 파이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캣니스와 피타가 수행하는 역할과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영화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무인 기계-그것도 인간이 조종하고 있긴 하겠지만)의 시선이다. 비극의 연인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공동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 헝거게임의 공동 우승자가 될 수 있었던 캣니스와 피타는 살아남은 후에도 그 역할의 진실함을 증명하길 계속 요구받는다. 세계관의 전 구역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우승 퍼레이드의 시작점인 자신들의 구역(12구역)에서의 방송에서 캣니스와 피타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 하며 우리는 그 모습을 송출하는 렌즈를 - 동그란 렌즈 속에 둘의 모습을 가두고 있는 - 응시하게 된다. 그 어떠한 작은 거짓된 떨림, 망설임 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이런 위협적인 무인 카메라의 움직임은 - 실제로 이것이 포착하는 것들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 헝거게임의 세계관에서 게임의 우승자에게 보장되는 모든 약속들이 얼마나 한계적인지, 얼마나 공허하며 갇힌 지위인지 보여준다. (실제로 12구역의 유일한 다른 우승자인 헤이미치는 한시도 술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 처한 현실을 한시라도 맨 정신으로 참아내지 못하는 - 알코올 중독자이다.)
마크 피셔의 글을 일단 재밌다. 구글에 도움을 요청해도 정확한 뜻을 알 기 어려운 - 사실 내 능력의 한계를 확인시켜 줄 뿐인 -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가 사유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인용들 또한 반복해서 구글링을 통해서만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사실 독해라는 행위 자체가 그것들을 전부 포함하는 것일 테지만)- 혹은 이해했다는 환상.
그가 헝거게임에 대해 쓴 말들이 더욱 재밌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글에서 정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신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물론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을 발견한 인간이 으레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얘기하고 싶어 진다. 마크 피셔는 그의 글을 통해 실제로 그 '멋짐'의 영역에 도달하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캣니스는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의 천장을 향해 화살을 쏜다.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한 그녀의 화살은 그렇게 인공 하늘을 무너뜨리며 헝거게임의 규칙아래 닫혀있던 세계를 확장시킨다. 마크 피셔의 글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마치 이 움직임을, 캣니스가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마치 두둥 하는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는 듯한 마지막 문장 - This is the revolution... 이런 연출 자체가 재미있고 멋있으며 역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