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석 Sep 16. 2016

너무 익숙해져 버린 판타지

<싱 스트리트> 존 카니, 2016

영화는 판타지를 그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도 있지만 다수의 영화는 현실을 닮은 배경에, 허구의 인물을 채워 그려낸다. 감독은 이 허구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희망찬 판타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우울한 판타지를 보여주기도 하며, 그 어느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판타지를 그리기도 한다.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그린다고 해서 나쁜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희망찬 판타지를 그리면서 그것이 아닌 척하는 영화는 불편하다.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영화에서 음악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연스럽게 영화의 음악은 많은 주목을 받고 소비되며 내용적인 부분은 상대적으로 얘기되지 않는다. 존 카니의 세 영화가 내용에 있어서 비슷한 스토리 라인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며 음악을 활용하는 모습에 있어서도 그 차이점을 보인다. 가장 강하게 느껴진 차이점은 원스에서 음악이 인물들의 감정을 연결하며 스토리에 무게감을 더해주도록 '사용되었'던 반면에  비긴 어게인과 싱 스트리트에서는 음악을 소개하고 보여주기 위해 스토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싱 스트리트의 스토리라인은 꽤나 진부하고 단순하다. 코너(페리다 월시-필로 역)는 라피나(루시 보인턴 역)라는 소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즉흥적으로 밴드를 결성한다. 학교 구성원을 모아 '싱 스트리트'라는 밴드를 결성한 코너는 라피나를 위해 곡을 쓰고 뮤직 비디오를 만들며 학교 축제에서 공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의 밴드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된 코너는 라피나(모델의 꿈을 가진)와 그들의 꿈을 향해 작은 보트를 타고 영국으로 떠난다.


직선적인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음에도 싱 스트리트는 지루한 영화가 아니다. 큰 줄기는 예상 가능하지만 이야기를 이루는 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매력적이다. 소년들을 옷을 잘 입고 자신감이 있고 무엇보다 음악을 만들 줄 안다.


때로 진심이라는 것은 창작물을 통해서만이 그 본모습에 조금 더 다가선다. 문장으로 발화하지 않고 음악으로 속의 이야기가 표현되었을 때, 소년들을 빛난다. 코너가 라피나와 이야기하던 중 음악을 녹음하러 가고, 녹음된 테이프를 그녀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코너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모습이며 진심을 담아 어떤 것을 '창작'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코너가 음악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는 감동적인 순간들은 분명 싱 스트리트의 빛나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싱 스트리트의 불편한 그림자이다. 스토리는 철저하게 코너의 욕망을 투영하여 전진한다. 코너의 욕망에 의해서 밴드는 결성되고 그의 욕망에 따라 곡은 만들어지고 연주된다. 이 과정에서 다른 밴드 구성원들의 캐릭터는 철저하게 조력자로서 사용된다. 실질적인 작곡을 하는 에이몬은 그저 코너랑 음악 만드는 것이 즐거운 천재소년이며, 다른 밴드 멤버들 또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서는 악기만 연주할 뿐이다. 영화는 코너의 소년다운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소년들의 욕망과 역할을  철저히 제한한다. 싱 스트리트는 그렇게 욕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는 코너의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좋지 못함을 알 수 있는데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발전되어 코너의 엄마가 결국 집을 떠나는 상황이 오게 되자 영화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는 그녀의 욕망은 철저하게 가정파괴법의 모습으로 그린다.


다른 사람의 욕망에 대한 영화의(코너의) 왜곡된 시선은 코너의 밴드가 학교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코너의 상상으로 보이는 이 장면에서 라피나는 뮤직비디오를 위해 코너가 원했던 모습 그대로 꾸미고 나타난다. 폐인처럼 그려지던 코너의 형은 어느새 수염과 머리를 자르고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라피나를 힘들게 하는 남자 친구(라피나와 서로 동의하에 만나는 현재 남자 친구)를 칼(!)로 제압한다.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엄마는 어느새 아빠와 다시 로맨틱한 커플의 모습을 보이며 나타난다.


코너는 어린 소년이다. 모든 것이 그의 기준으로 돌아가길 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욕망은 배제하고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그들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욕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코너의 이러한 왜곡된 시선을 영화적으로 아무런 걱정과 불편함 없이 그린다. 그들의 연주가 끝나고 코너의 환상도 막을 내렸을 때, 영화는 그것을 코너의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년의 안타까운 꿈으로 연출한다.

많은 수의 자기계발서가 점점 더 외면받고 있는 이유는 꿈과 열정을 가지는 것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꿈과 열정에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현실적인 조건들과, 소수의 '성공한' 자들의 그림자 뒤로 사라진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꿈으로서 많이 그려지곤 하는 예술분야는 원하는 분야에 종사하게 되더라도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100명의 코너가 영국으로 떠났을 때, 1명의 코너도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욕망으로만 똘똘 뭉친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 새우며, 너의 꿈과 열정을 향해 '훔친 듯이 달려!'라고 외치는 것은 실제로 차를 훔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이제는 더 이상 나오면 안 되는 자기계발서를 생각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의 신성함을 걷어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