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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Sep 29. 2016

서울역의 사람들

<서울역> 연상호, 2016

사람들이 변한다. 의식이 없다 갑자기 일어나더니 괴상하게 움직이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공격당한 사람들도 똑같은 과정으로 하나 둘 변한다. 일상은 파괴되고 사회는 기능을 멈춘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일한 목적은 계속 '살아남는 것'이 된다. 영화가 그리는 좀비 사태는 이렇게 시작되고 그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이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좇는다.


좀비 영화는 특수한 재난영화이다. 무자비하고 일방적으로 인간을 무너뜨리는 자연의 힘 대신 '좀비'가 등장하면서, 이 기이한 존재를 둘러싼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꼬리를 물고 고개를 드는 질문들에 영화가 해결 의지를 보이느냐에 따라 '좀비'라는 동일한 요소를 다루는 영화라도 이야기 진행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월드워 Z>와 같은 영화가 좀비 사태의 진행과 해결에 좀 더 의지를 드러낸 영화라면,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좀비 사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에 집중한 영화이다. '부산행'에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생기는, 첫 번째로 감염자가 나타나는 경위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부산으로 향하는 KTX에 어째서인지 탑승한 혜선(심은경 역)이라는 감염자를 통해 '부산행' 속 좀비 사태를 시작시킨다. 그리고 '부산행' 한 달 뒤 '모든 것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라는 홍보문구 아래, 부산행 속 첫 번째 감염자 혜선을 주인공으로 앞세우고 '서울역'이 개봉한다.

상화(마동석 역)를 필두로 한 인물들이 보여줬던 본격 좀비 소탕 액션. 위기의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해가며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한 칸 한 칸 KTX를 이동했던 주인공들의 영웅스러움. 이상적인 주인공들과 좀 더 '현실'을 대변하기 위해 등장하는 듯 보이는 용석(김의성 역)의 대결. '부산행'에서 이런 요소들에 재미를 느꼈던 관객들은 '서울역'에서도 비슷한 재미를 느끼길 기대하며 극장으로 향했을지 모르겠다. 또한 '부산행'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좀비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겠다는,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극장을 찾았을지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네이버 별점(네티즌 3.9, 관람객 5.25)에서도 보여주듯이 '서울역'은 위의 두 가지 요소 다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주인공 '혜선'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희대의 답답한 인물로 평가되며 욕을 먹는다.


<서울역>은 <부산행>과 여러 부분에서 다른 감독이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다르다.(연상호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부산행>이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지만) <서울역>은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값을 제외하고는 멀티플렉스 상영관 주요 시간대에 어울리는 구석이 많지 않다. 외국의 깔끔하고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애니메이션과 더빙은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어색하다. 인물들은 주류적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 뿐이다. 이들은 도망 다니기 바쁘고, 도움을 청하기 바쁘며, 결론적으로 여러모로 능력이 부족해서 좀비를 잘 죽이지도, 위험에서 슬기롭게 벗어나지도 못한다. 결정적으로 <서울역>은 <부산행>을 즐긴 관람객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 좀비 사태가 발생한 이유에 관심이 없고, 좀비들을 멋있게 퇴치하며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인물들이 감동적으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다.


좀비 사태가 발생했을 때 지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좀비를 다루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이 안전한 공간을 찾기 위해, 사수하기 위해,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은 자주 등장한다. 한때 평범한 주거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좀비라는 존재에 등장에 의해 주거지를 빼앗기고 그 상태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반면 <서울역>의 인물들은 다른 출발지에서 좀비 사태를 맞이한다. 그들은 좀비 사태 전에 이미 '안전한 주거지'가 결핍되어있다. <서울역>의 시선은 좀비와 좀비를 둘러싼 궁금증에 있지 않다. 바로 이들 '집이 없는 사람들'에 있다.

서울역은 주거공간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부산행>에서 노숙자 역할로 나오는 최귀화 씨는 프로그램에 나와 역할을 위해 직접 노숙자 생활을 체험했다고 말한다. 서울역의 공간에 들어가 많은 노숙자들과 만나고 얘기했다고 한 그는 그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서울역의 그들은 분명 평범한, 각자의 주거지에서 하루를 맞이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 속에서 서울역에 자리를 잡게 된 그들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그들의 평범함은 주거지를 잃으면서 사라진다. 주거지를 소유하는 것, 어떠한 형식으로든 일상의 마무리에 돌아갈 공간을 가지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최소한의 것으로 인식된다. 주거공간이라는 사회적 마지막 그물망에서 조차 떨어져 버린 이들은 누군가가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랍니다."라고 얘기해줬을 때에야 '평범하게' 바라봐 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현대사회의 마지막 그물망과 서울역이라는 공간은 되돌아오기에는 아주 멀고도 어려운 길이다. 누군가의 주거공간은 더욱 좋아지고, 안전해지고, 편안해지지만, 길에 한번 내려앉은 이들에게 구제는 기적과도 같다.


<서울역>에서의 좀비 바이러스는 서울역의 사람들 중 한 명에게서 시작되어 서울역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퍼진다. 당연한 과정이다. 4개 또는 그 이상의 벽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간이 없는 이들은 많은 것들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있다. <서울역>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쫓아감으로써 좀비 영화를 포함한 재난 영화들이 그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보여준다. 보통 혹은 그 이상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인물들의 일상을 재난이 어떻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익숙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애초부터 일상이 위협받고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고, 보지 않는다. 이미 개인적 재난을 통해 주거공간을 잃은 이들은 그저 운이 없어서, 실력이 없어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로 여겨진다. 영화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좀비 사태를 통해서야 서울역의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이 된다. 하지만 서울역의 사람들은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 속에서, 좀비 사태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라도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공간을 바랄 뿐이다.

서울역의 사람들 중 문제의 혜선이 있다. 혜선은 주요 인물이지만 극을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혜선은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치이며 어딘가로 나아가고 그 모습을 화면이 따라갈 뿐이다. 혜선은 좀비가 나타난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덜덜 떨며 울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의지가 없으며 허둥대다가 다른 인물을 위험하게 만든다.. 좀비 사태 속에서 그녀는 너무나 작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에 우리는 답답함을 호소하고 욕을 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사람을 먹으려고 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한 행동이란 무엇일까. 영화 속 영웅들에게 익숙해져 있지만 결코 영웅이지 못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혜선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좀비(악당)들을 강력한 힘과 두뇌로 멋있게 때려 부수고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면 마동석 씨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거나 마블 영화만 봐야 한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혜선이 많은 결핍을 가진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혜선은 그의 삶에서 더 나은 것들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스스로 얻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집을 나왔지만 그런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이용한 사장님과 '애인'은 그가 더 이상 그들을 통해,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싫다는 의사를 보일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폭력으로 그 '상태'에 가두고자 한다. 여기서 혜선이 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제한되고 삶은 악순환의 틀 속에 갇힌다. 그를 가두는 이 힘에 대해 저항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그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다.

반짝거리도록 꾸며진 주거공간을 홍보하는 광고들이 서울역을 포함한 일상의 공간에 늘어선 모습을 영화는 노골적으로, 여러 장면에 걸쳐 보여준다. 그 광고들을 우리는 보고, 영화 속 인물들도 본다. 누군가에게 주거공간은 더 나은 환경으로 바뀌기도 하고, 여러 개로 늘어나기도 하고,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이 광고 너머에서 우리가 미래에 살게 될 수 도 있는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을 보지만 서울역의 인물들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정작 현재 주거공간이 없고 필요한 서울역의 이들에게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말 원했을 테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공간에서 혜선은 자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지고, 서울역의 이야기를 가지고 부산행 KTX에 오른다. 이야기는 모두 들려졌지만 혜선과 서울역의 이야기는 결국 덤덤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저 답답한 X, 암 걸리는 X, 이유 없이 기차에 타서 승객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X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 수많은 혜선의 이야기들이 무시되거나, 애써 무시되거나, 욕을 먹다 어느새 사라져 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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