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351©진은영, 2008,『우리는 매일매일』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아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았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2008,『우리는 매일매일』
46-47쪽
나는 그래
나에겐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
많은 이의 입김도 당연히
나에겐 소수의, 내 사람이 귀하다.
몇몇 그들이 다수의 몫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럴 필요 없는 일에 뛰어들거나
나를 내 사람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같은 말로, 같은 의미로
나에겐 많은 추억이 필요치 않다.
수많은 기억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나에겐, 나를 만들어낸 결정적 조각 몇 개가 귀하다.
잃고 싶지 않으면서 잊고 싶지 않은
꿈이었는지, 바람이었는지,
그날 내가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진 것들
다 보기 좋은 색을 가지진 않았다
보기 흉한 색을 가진 몇 개의 존재 여부도 중요하다.
해서, 난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다.
하루가 꼬박 필요하기도 하고 십 년 혹은 몇 년이- 필요하기도.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뒤집을 때가 되면, 뒤집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