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륙(Kontinental)에 사는 우릴 또다시 집요하게 폭로할 거다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Kontinental '25), 2025
루마니아 / 109분
감독 라두 주데
집요하게 주시한다, <콘티넨탈 '25>
오르솔리아는 법원 집행관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불법 거주 중인 사람들을 퇴거시키는 일은 다년간 쌓인 경험으로 충분했고, 업무 방식엔 따뜻한 인정이 깃들어 있었다. 특히 강제 퇴거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렸다. 직접 판사에게 부탁해 퇴거 통지를 미뤄주거나, 갈 곳 없는 자들에게 쉼터를 연결해 주는 등, 그들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다. 따스한 말과 눈빛은 당연했고, 일이 끝난 후에도 그들에게 안부를 물을 줄 아는, (다른 동료보다 인간적이라고 스스로 자신하는) 법원 집행관이었다. 적어도 콘티넨탈 부티크 호텔이 들어설 부지 내, 한 건물 지하실에 불법 거주 중인 노숙인이 퇴거를 거부하고 자살하기 전까진 그랬다.
노숙인의 자살로 오르솔리아의 직업의식은 위태로워진다. 그녀를 지켜주던, 최소한의 안전띠 역할(카메라와 군사경찰)도 더는 기능하지 못한다. 폭력 없이 일이 진행 중임을 기록하기 위해 찍던 비디오엔 결과적으로 충격적인 상황만 담게 되었고, 현장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져도 방관하던 경찰 대신 선택한 군사경찰은 노숙인을 살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본인들 안부만 걱정했다. 왜? 노숙인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절차가 합법이었고 대처도 훌륭했기에 그녀 역시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었다. 그러나 오르솔리아의 일상은 도미노로 지어진 성이 와르르 무너지듯 처참히 붕괴한다. 오직 그녀에게만 ‘비극적 사건’으로 정립됐기 때문이다.
노숙인의 얼굴을 비추던 군사경찰의 집요한 손전등 불이 오르솔리아에게로 향한 순간, 카메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고군분투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정말, 감독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오르솔리아의 고통을 빌미로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역사, 전쟁, 정치와 사회 구조 문제 나아가 자본주의가 앗아간 인류애까지 고작(?) 아이폰으로 생생히 전달한다. 관객에게 질문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 개인의 웃픈 발버둥을 여러 곳을 배경으로 전시(폭로)할 뿐이다.
무릇 고통은 삼키는 게 아니라 토해내야 한다고 했던가‥, 오르솔리아는 가슴에 박힌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나 끊임없이 분출한다. 남편, 친구, 엄마, 옛 제자, 신부님에게 그날의 일을 설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위로받는다. 비극이 벌어진 이유를 찾다가 부동산업자들이 도시를 망쳤다고 결론짓고, 사실 법원 집행관을 하기 싫었지만 돈 때문에 했으며, 진짜 꿈은 피해자만 변호하는 변호사였다고 고백한다. 죽은 노동자를 향한 슬픔과 안타까움은 시신으로 발견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변환된다. 튀어나온 안구와 오줌을 비롯한 온갖 악취, 보일러에 철사를 묶어 목을 졸라 죽은 모습을 나열할 때마다 그녀의 오열(위선)은 점점 더 극적으로 치닫는다. 그 결과 내 탓인 것만 같단 ‘자책’은 가족이 아니었다면 나도 자살했을 거란 ‘토로’로 귀결된다. 모두가 예상했듯, 그녀는 결국 극복하지 못한다. 아니, 반복적으로 떠들어서 고통을 비워내는 방식은 계속될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날을 기억에서 도려낼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관점이 넓든 좁든 오르솔리아에게 책임이 정말 있는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단,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그녀의 고군분투에 담긴 이슈들이 하나도 없었다면 난제였어도, 심지어 공감 받든 비난 받든 쉽게 답했을 거다. 고려돼야 할 우선순위가 뒤틀리고 노력의 동력이 점차 자책 대신 억울함으로만 채워졌음을 알지만, 누구도 딴지 걸 마음은 없었을 테니까. 아마 대부분은 ‘평범하고 마음 따스한 사람에게 어쩔 도리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라고 못 박았을 테다.
그러나 우린 어째선지 침묵으로 답 아닌 답을 내린다. 물론 침묵을 원한 건 절대 아니다. 오르솔리아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일이 못마땅해서도, 죽은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이 어려워서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그녀가 우리와 퍽, 닮아있다는 현실감 때문이다. 감독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관찰자 역할을 줬던 관객에게 돌연 주인공 역할을 부여한다. 노숙인의 도시 탐방이 비극으로 끝나는 동시에 시작된 오르솔리아의 분투는 결코 서서히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끝이 예정된 일인 듯 우리에게 휘몰아치는 순간, 우린 그제야 관객마저 감독의 블랙코미디 요소로 여지없이 쓰였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원했던 결말이 아니었듯, 우리가 바라는 끝맺음도 없을 거란 예감까지 드니, 여러모로 난처한데 어떠한 반응도 할 수가 없다. <콘티넨탈 '25>은 누구나 마주할 수 있고,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오르솔리아는 남편에게 가족여행에 드디어 합류하겠다고 말하며, 극복하지 못했으나 앞으로의 계획을 전달한다. 집행관을 그만두고 교사를 하겠다고, 나아가 무연고 무덤에 꽃을 놓겠다고‥. 역시 예상한 바다. 그녀는 앞으로 노숙인이 생각날 때마다 호소를 들어줄 사람을 찾거나 주기도문을 외우는 대신 꽃을 들고 무연고 무덤을 찾을 게 분명하다.
누군 불쾌할 수도 있고, 그녀처럼 죄책감에 휩싸일 수 있다. 갑자기 주인공으로 선택돼 혼란을 겪다 포기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무력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힘주어 말하지만, 영화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옳은 방법이고 어떻게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해결해 가야 하는지도 당연히 알려주지 않을 거다. 대신 어디선가 우릴 지켜볼 거다. 그리곤 돌연 두 번째 <콘티넨탈 '25>을 내놓겠지. 심히 웃프고, 가슴 철렁이게, 어떠한 대처도 통하지 않게, 이 대륙(Kontinental)에 사는 우릴 또다시 집요하게 폭로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