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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pr 01. 2024

우연한 친절에 감동한 적이 있는가

정세랑 소설, <재인, 재욱, 재훈>

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친절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친절인지 아닌지도 모를 작은 사소함에 감동한 적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일상 그 자체인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제각각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늘 긴장감 속에 하루를 사는 현대인들인지라 그들 사이의 단단한 질서와 경계가 따분하고 숨 막히다고 느낄 때 누구든 작은 파격을 그린다. 정세랑은 그 작은 파격으로 우연히 갖게 된 '세 남매의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재인, 재욱, 재훈 세 남매는 피서 여행 중 형광빛이 나는 바지락을 먹고 각각 초능력을 얻는다. 처음에는 장난감처럼 초능력을 사용하던 세 남매는 점차 타인을 돕고 문제 해결에 나선다. 재인은 룸메이트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고, 재욱은 이국에서 사고를 당한 소녀들을 구하며, 재훈 역시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 남부의 학교에서 범죄를 막는다. 세 남매가 각별하거나 애틋한 사이도 아니다. 그냥 우리 주변의 무덤덤한, 보통의 남매 사이다. 애정 표현도 제대로 하지 않는, 이들 세 남매가 제각각 초능력을 얻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까. 


정세랑 소설 <재인, 재욱, 재훈>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 남매가 초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들어 있다. 보통의 인간들은 갑자기 없던 능력이 생겼을 때 어떤 상상을 할까. 평소 괴롭히던 누군가를 혼내주는 상상? 재물을 내 것으로 만들어 원 없이 쓰는 것? 작가가 택한 길은 '평범하면서도 작은 친절'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 자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 남매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따뜻하다. 엄마는 신경질적이고 자식들을 막 대하는 듯 하지만 도리없이 흐르는 특유의 모성애가 있다. 재인의 연구소 사람들, 룸메이트 역시 더할 수 없이 다정하다. 아랍 사막의 공사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노동자, 염소 농장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재훈의 주변 사람들 역시 따뜻하고 친절하다.


이 젊은 작가는 각박한 세상이 적어도 이 정도쯤 되었으면 하고 소망하는 듯하다. 현실 속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나와 타자가 섞일 때 경계와 질서가 생긴다. 우리가 사는 장소는 선을 넘지 않을 때의 안도감과 선을 넘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매 순간 교차하는 곳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질서가 숨이 막히는 장치다. 


하물며 수천 년 인간의 역사 속에 단단하게 형성해 온 경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각박한 세상에 온기를 더 하는 것은 엄청난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마음들일지도 모른다는 것, 작가의 상상력이 닿은 곳이다. 


판타지적 요소가 전편에 넘치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타자에 대한 경계로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작은 도피처가 될 수도 있다. 사소함 속으로 빠져든 독자에게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호통칠 일도 아니다. 고단하고 지친 현대인들이 누구라도 한번 쯤은 상상할 법한 '우연히 찾아든 따뜻한 세상'을 그리고자 한 저자의 의도에 공감한다. 


-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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