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심으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통. 이 어렵고 추상적인 단어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오면 아주 생생하고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고통의 얼굴은 저마다 다른 외연을 띠고 있으나,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은 거짓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 고통받는 인간은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것의 본질과 추이에 대한 질문이 나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고 많은 이야기 중 왜 하필 자전적 이야기를 했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말은 인간성이 말살된 비극적 사태 이후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고통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창작 행위는 기만이 아닌가?라고 질문함으로써 윤리적 창작의 ‘가능성’에 대해 묻는 것이다.
나 역시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일에 함부로 뛰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이 ‘남의 고통’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제대로 말할 수 없으면 차라리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침묵한다는 것은 곧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나는 첫 책을 통해 나의 고통으로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운 ‘타인’인 어머니의 고통을 ‘감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글쓰기 교실 사람들, 위안부 여성, 제주 4‧3 사건으로 매우 조심스럽고 허술한 발걸음을 떼었다. 내가 이토록 미약한 발걸음을 뗀 이유는, 나는 이제 나에 관해서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은 아무래도 허무한 일이다. 그러니 나에게서 시작한 발걸음이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했다. 내가 겪지 못한 또 다른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다면,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즉 삶의 비극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행동할 '이성(로고스)'의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정신의학자로, 수용소라는 거대한 인간 실험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고통 주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는 그들을 통해 이 지옥 속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질문한다. 그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가 야만의 상태로 흘러가도,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그 마지막 보루란 바로 불행 속에서의 ‘자유 의지’다.
나는 이제 또 다른 고통으로 본격적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통과 내 어머니의 고통과 닮은, 또 다른 얼굴들을 찾아 나선다. 아니, 그 얼굴들은 이미 존재했으나, 내가 무지했을 따름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부터 아는 것. ‘앎’에서부터 ‘상상’은 시작된다. 상상은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별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다. 현실이 상상에, 상상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북토크 때 만났던 어느 독자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행사가 끝나고 나서 어느 독자분이 내게 다가와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셨다. 그는 이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버리셨다. 그분은 세상에 할 말이 많은 분이었는데, 일단은 침묵하겠다는 인상을 남겼다. 나 역시 그분과 같은 입장이다. 다시 침묵하는 자리로 돌아간 후, 하고 싶은 말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이다.
나에게는 기다리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 기다리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주변에서 눈물을 머금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창작자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뭣도 아닌, 기다리며 기억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 테오도어 W. 아도르노, 『프리즘』, 문학동네, 29쪽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