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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Apr 13. 2024

점여행자가 선여행자가 되는 경험

강릉 도보 여행

건축교육을 받고 건축을 다루는 직업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고 있어 건축물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익숙한 편이다. 그렇다고 건축의 물리적 디테일에 천착하는 여행을 하는 건 아니고…(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고민 중인 디테일 - 예를 들면 캐노피, 기둥 마감, 필로티 천정의 마감, 선홈통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아 한때는 나도 건물의 물리적 요소에 깊은 관심을 둘 때가 있긴 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랑 연관 있을 때에 한해서지만,

현재는 건축물의 컨셉과 건축가의 의도, 건축비가 만들어진 배경에 더 관심 있다. 직접 가서 건물을 볼 때 그런 배경들이 보이는 건 아니라서 건물과 붙어있는 오픈스페이스, 진입 동선, 넓어봤자 반경 10미터 안팎의 인접 주변을 살펴보는 것에 한정된다.

여행자의 특성으로 분류하자면 점을 찍듯이 여행하고 잠시 그 점에 머무르며 점의 10미터 안팎을 보는 점(건축) 여행자 스타일이다. 추가로 그 건물의 건축물대장을 떼보거나 기사를 찾아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나에게 여행의 방법을 바꾸는 계기가 된 일이 있었다. 급작스럽게 떠나게 된 강릉여행 전날 프로(?) 도시여행자 지인이 얼마 전 강릉에 다녀온 사실이 생각나 여행코스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가 꽤 장문의 카톡을 회신받았다.





1. 경강로 2046번 길, 임영관 삼문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축물 5개 중 하나인 곳입니다. 칠사당 등이 모두 붙어있는 전통건축물 군이 있고 이곳에서부터 경강로 2046번 길 따라서 오뉴월커피까지 걷다 보면 ’명주배롱‘, 스테이폴리오에 올라오는 스테이 등을 모두 볼 수 있어요. 마음에 드시는 곳으로 발길 따라…   


2. 창포다리, 오성정, 노암길, 댄싱터틀

오뉴월카페에서 더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 창포다리‘(도보전용)가 있어요. 그 다리 넘어가면 남산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정상에 ’ 오성정‘도 멋있었어요. 하지만 날씨가 제가 갔을 때보다 많이 추워졌으니 바람이 많이 불 수도 있겠네요. 오성정을 넘어서 내려오면 ‘남산길’, ‘노암길’이 나오는데 쭉 걸으면 ‘안다미로’, ‘댄싱터틀’ 같은 카페가 군데군데 있는 찐로컬동네가 나와요.  감나무 주렁주렁 주택가가 이 동네(노암동)이에요.





이런 식으로 넘버링을 하면서 (무려 7번까지) 길게 이어지는 글이었다. 여행 가기 전날 “강릉 가서 뭐 봐요?”로 받은 답변치 고는 꽤 길었다. 자판기에 한 500원 넣었는데 오만 원어치를 받은 것 같은 그녀의 장문의 안내문에는 무슨'로'을 따라서, 무슨'길'을 지나서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도보 여행의 경력(?)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우선 나는 그녀가 말하는 '선형'의 공간들을 ‘점’으로 신속하게 변형해서 나의 네이버 지도에 열심히 별표를 찍었고 그 지도를 보면서 여행을 했다. 그녀의 가이드를 여러 번 읽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지도에 찍힌 점과 함께 점이 놓인 '선'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마커스호텔-경강로-버드나무브루어리-경강로-독립영화극장신영-문화의 길 - 토성로 - 단지(이모카세)

청량리역에서 오후 3시 기차를 타고 오후 5시에 강릉역에 내려 모텔과 여인숙이 즐비한 길을 걸어갔다. 가방을 내려놓을 숙소는 숙소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 경강로와 강릉대로 지난 마커스 호스텔이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배정된 방에 백팩을 내려놓고 시내버스를 타고 경강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버드나무브류어리에 도착했다. 2년 전 차량으로 강릉을 여행했을 때 맥주를 포장 구입만 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었던 곳이다.

버드나무브루어리의 맥주는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강릉의 오래된 독립영화 극장 신영에 저녁 7시 <너와 나>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 시간에 여유 있게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나와 다시 경강로를 동쪽으로 거슬러 신영극장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연히 명화점 - 인도 여행자의 바이브가 가득한 마살라 짜이집을 발견했다. 어둑한 길에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에 홀린 듯 이끌려 들어갔다. 몇 분 머무르지도 못했는데 사장님의 여행 얘기, 짜이에 대한 설명, 명화 상점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지역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따뜻한 짜이를 한 잔 먹고 영화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영화 너와 나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엄청나게 울었다는 이야기만 어디서 전해 듣고 나 역시 잔뜩 울 준비(?)를 하고 갔는데 눈물이 하나도 나지 않아서… 공감 능력의 문제인가 지능의 문제인가 살짝 의심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수학여행, 제주도, 안산에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쩌면 저렇게 학생들이 학생 같냐며(?) 연기력에만 몰입한 나… 완전 쌉티? 나중에 영화리뷰를 보고 영화에서 함의하고 있는 것들의 리뷰를 전해 들으며 세월호를 기억하는 감각이 이렇게 무뎌진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화관에서 나와 토성로에 있는 이모카세집 단지에 갔다. 계란말이 주먹밥 부추전 수육 등이 소소하게 나오는데 가장 하찮아 보였던 마른 멸치와 주먹밥이 제일 맛있었다. 뭔가 외관부터 나 좀 하찮아 보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과 상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막걸리 종류가 강릉 막걸리와 옥수수 막걸리(둘 다 매우 단맛) 밖에 없어서 켈리를 먹어야 하는 게 아쉽지만 아주 가성비가 좋은 식당이었다.



금성 해장국-남문길-오뉴월 커피-창포다리-오성정-남산길-안다미로-노암길-댄싱 터틀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을 찾았는데 금성 해장국이라는 소머리 국밥집이었다. 경강로로 동쪽, 서쪽을 인지하면서 걸었다.(강릉에서 이동하다 보면 경강로가 중요한 지표가 되곤 했다.) 경강로에서 임영로로 진입해서 남대천방향으로 걸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전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금세 자리가 꽉 찼다. 한 그릇의  맑은 소머리국밥 안에 밥과 다진 양념이 다 들어있는 스타일로 음식을 내왔는데 국물이 많은 깍두기가 담긴 반찬 그릇을 인원수대로 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나올 때 보니 대기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금성 해장국에서 나와 배를 두드리며 근처의 오뉴월 카페에 갔다. 이 카페는 마치 좋은 카페의 정석 같은 느낌이었다. 커피 맛이 좋고 아름다운 식물들이 있고 디자이너의 손길이 구석구석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카페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를 챙겨주시는 손길까지 완벽한 카페시간을 보냈다.

오뉴월 카페 남쪽에 있는 남산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보행 전용 다리인 창포 다리를 건너서 남산공원 언덕 위 오성정까지 걸었다. 오성정에서 북쪽의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오성정을 넘어 남산길과 노암길을 걸어 안다미로라는 주택을 개조한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안다미로 사장님이 우리 일행을 금성 해장국에서 봤다며 아는 체해주셨다. 안다미로가 있는 노암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닐듯한 조용한 주택들이 있는 골목길인데 마당에 감이 주렁주렁 달린 집이 많아 감나무를 구경하면서 걸었다. 노암길에서 김윤기 가옥까지  걷다 보면 거의 끝에 다다라서 거북목욕탕을 개조한 댄싱터틀이라는 샵이 나온다. 연속적으로 뭔가를 먹은 상태라 댄싱터틀에서는 공간 구경하고 (예상대로 욕조도 있고 사우나 공간도 있었다) 굿즈만 사서 나오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차를 서비스로 주시고 원래 고양이 북 카페를 운영하셨던 썰도 들려주셨다. 가게를 갈 때마다 뭔가 사장님들 가게 차린 썰을 듣게 되는 일이 자꾸 생겨서 재밌었다.



월화거리-월화상점, 강릉네컷-여고시절 카레떡볶이-임영로-여러 상점들로 가는 길

다시 북쪽으로 경강선과 창포다리 사이의 다리를 건너 월화거리에서 월화상점과, 강릉 네 컷 등을 구경하고 네 컷 사진도 찍었다. 점심으로 여고시절 카레떡볶이를 먹었다. 이곳은 항상 줄이 길다. 가격도 저렴하고 혼자 3인분을 먹겠다는 손님과 너무 많다며 질겁하는 사장님과의 실랑이를 엿듣는 것도 즐거웠다. 배도 꺼트릴 겸 금성로 주변의 코닥 어패럴, 디오다 강릉, 코오롱스포츠에서 캠핑 용품을 구경하고 임영로를 따라 북측으로 올라가면서 한국은행 강릉본부, 김영관 삼문, 천주교 임당동 성당을 지나서 각종 상점들을 구경했다.


상점들 : 유라 유라 / 산소울도 자기 공방 / 사유의 공간 / 오어즈 / 시만차-찻집 / 한낮의 바다 (서점)

강릉에 왜 이렇게 이런 소품샵이 많은지 어리둥절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유라유라 상점은 일본풍의 굿즈들이 있었고, 산소울 도자기 공방은 도자기로 만든 굿즈들이 있는데 산소울 공방이 특히 좋았다. 뭔가 자본주의와 관계없이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거 만든다? 가 전달되는 특유의 느낌, 이곳에서 산그림이 있는 엽서를 몇 장 샀다. 사유의 공간에는 궁극의 빈티지 소품들이 많았는데 하나하나 오래 구경을 하고도 뭔가 뚜벅이 여행자의 특성상 아무것도 못 사고, 오어즈에서도 구경만 하고 빈손으로 나왔다. 사야 할 때를 놓친 자에게 남는 것이 없다. 후 -  연속적 물건 구경에 지친 눈을 쉬고자 시만차에서 얼음이 담긴 우롱차를 마시며 산을 형상화한 듯한 카운터의 벽 마감을 바라보면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상점이 밀집된 임영로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한낮의 바다라는 서점으로 이동했다. 제주도에서 갔던 책방 소리소문 이후에 정말 큐레이션이 정성스럽고 굿즈도 딱 내 취향인 곳이라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뭔가 많이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내부는 촬영이 불가하다.  


또 상점들 - 레드망치/라이크어거스트, 얼라이브홈(일식집), 별일 없이 산다( 술집)

그리고 또 레드망치와 라이크어거스트에서 소품을 구경했다. (이쯤 되면 강릉 여행의 다른 말 소품샵 구경) 그리고 숙소에서 가방을 찾고 감자 유원지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감자 유원지의 공간과 메뉴가 딱히 마음에 안 들어서 강릉 대로 203번 길을 지나다가 발견하고 찜해두었던 단독주택을 개조한 일식당 얼라이브 홈에 가서 라멘과 기린 맥주를 마시며 여행 마무리를 했다. 20시 기차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남아서 체력을 모으고 모아 별일 없이 산다는 술집에서 하이볼과 무알코올 칵테일을 마시며 남은 시간까지 놀고 있었는데 강릉 대로 210번 길 주변에도 공예품점과 괜찮은 카페들이 좀 있는 것을 발견.. 이틀로는 모자라다 강릉


국가보다 도시가 오래되었고 건물보다 길이 오래되었다. 요즘 특화상권거리에서는 입점업체들이 3회전 한 뒤 쇠락해 버려 다 쓴 길이 된다고 하는 말도 있던데 그런 부동산 효용가치와 별개로 길은 다 쓰면 쓴 대로 쓰고 있으면 쓰고 있는 대로 볼거리가 이야깃거리가 많다. 길 위에 놓여있는 건축만 보다가 길을 인지하게 되니 이제까지 다니던 곳들이 다 새롭게 보인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더니 길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걸 좋아하게 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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