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스 백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톨레도는 화가 ‘엘 그레코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엘 그레코는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엘 그레코’는 그의 본명이 아닌 ‘그리스 태생’이라는 별칭이라고 한다. 엘그레코는 화가로서 로마에서 별 인기를 얻지 못하자 당시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서 대규모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고 1577년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러나 국왕은 그의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았고 엘 그레코는 원하던 궁정화가로는 남지 못하고 당시 종교적 중심지였던 톨레도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톨레도는 신앙과 종교예술이 중시되는 분위기여서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서 성공적인 화가로 자리 잡게 된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누구라도 그의 작품인 것을 알만큼 독특한 스타일을 느낄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긴 비율의 신체, 마치 만화 같은 강렬하고 눈길을 끄는 색채, 신비로운 조명기법으로 그의 종교화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또한 귀족들의 많은 주문을 받게 된다.
1323년 사망한 톨레도 지방의 귀족 오르가스 백작은 일생동안 성당에 재정 지원을 하며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을 도왔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그의 남은 재산마저 가난한 성도들과 수도자들이 쓸 수 있도록 유언을 남겨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까지 선(善)을 실천한 그의 행동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되고 그가 죽자 하늘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였다.
오르가스 백작의 삶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게 된다. 고대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여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데서 자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항상 실천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이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sesse oblige)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로 이어져 사회지도층에 대해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라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로 만들어진 것인데 오르가스 백작이야말로 이를 충실히 실천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르가스 백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의 사후까지도 톨레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엘 그레코의 걸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오로지 톨레도 산토 도메 성당을 방문해야만 볼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여행객이 많은 시기에는 그림을 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고 했는데 내가 방문한 시기는 다행히 비수기여서 충분히, 여유롭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성당에 들어서자 정면에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The Burial of the Court of Orgaz) 벽화가 관광객을 맞이해 주었다.
이 그림은 현실 세계와 상상, 그리고 지상과 천상을 나타낸 것으로 구분되는 데 그림에서 보면 시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이가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리고 다리를 감싸고 있는 이가 스테파노 성인이다.
망자를 둘러싸고 있는 조문객들은 당시 스페인의 저명한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그림 왼편으로 횃불을 든 검은색 옷을 입은 소년이 등장하는데 바로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로 소년이 든 작은 손수건에 아들의 출생 연도인 1578년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테파노 성인의 머리에서 수직선 상으로 위쪽에 엘그레코의 자화상도 볼 수 있다.
엘 그레코는 천상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사이에 두고 노란색 머리의 천사가 하얀색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아기는 하늘로 올려지고 있는 모습이니 다시 태어난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장면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림 앞에는 오르가스 백작의 무덤이 있어 무덤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어 무덤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니 당시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장례화로서 이보다 멋진 그림이 있었을까 싶다.
어쨌든 오르가스 백작은 그의 선한 행동으로 살아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사후에도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남아 산토 도메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화와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으니 오르가스 백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살아서, 그리고 죽어서까지 쭈~~ 욱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