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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zemberersten Jan 27. 2024

나는 여전히 자유낙하 중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본관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

전시가 끝나기 며칠 전,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하여 키키 스미스의 개인전을 보고 왔다.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는 키키 스미스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며, 1994년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자유낙하’라는 키워드를 통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전개해나간 키키 스미스의 예술적 특성을 풀어낸다. 이는 작가의 작품 속 내재된 에너지를 의미하고, 여성 중심 서사를 넘어 범문화적인 초월 서사를 구사하는 스미스의 방대한 작품활동을 한데 묶는 연결점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전시를 보고 난 뒤, 이 예술가에게 매료된 나는 인터넷에서 키키 스미스의 인터뷰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런던의 아트매거진 <아폴로APPOLLO>에 실린 작가 인터뷰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녀의 팔에 그려진 파란색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본 내용이었다. “한때 별이었던 것이나, 지금은 그저 점일 뿐이다.These used to be stars, but now they’re dots.”라고 대답한 작가는 자신의 팔과 다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려진 별들이 이집트 신화 속 하늘의 여신이 별로 뒤덮인 자신의 몸을 쭉 뻗어 지구를 감싸는 것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밤’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하늘의 여신 누트Nut가 매일 밤마다 태양을 잡아먹고, 이 태양은 밤 동안에 누트의 몸 속을 지난 다음 아침이 되면 여신의 무릎에서 다시 솟아난다. 그렇기에 누트는 사자(死者)를 수호하는 신이며,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누트처럼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키키 스미스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비유와 상징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자신의 작품활동이 ‘정원을 거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며 배회하는 움직임wandering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뚜렷한 목적지를 설정하고 이를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을 반복적으로 맴도는 방랑자의 걸음을 상징한다고 느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매체와 개념을 맴돌며 삶과 죽음, 실제와 이상, 물질과 비물질, 남성과 여성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경계선 언저리에서 사유하는 작가 자신의 배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외되거나 아직 닿지 않은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담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작가는 에이즈, 임신중절 등을 비롯한 인권과 평등, 정체성, 젠더 담론 등의 새로운 물결이 파동하던 1980년대 미국에서 스미스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다양한 작업들 중에서 동판화 작품과 사진 매체를 활용한 작품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이전까지 자주 보지 못했던 형태의 작업이기도 했고 여러 번 반복하여 작품을 찍어내는 방식과 사진과 회화를 통한 포토몽타주나 사진과 공예를 결합한 포토콜라주, 사진을 청사진으로 활용하여 이를 여러 번 겹쳐 판화로 찍어내는 작업 등이 매우 새로웠다. 자신의 머리와 목을 본뜬 고무 캐스트에 잉크를 묻혀 석판에 찍어내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여 복사기로 인쇄한 모습을 전사한 작품이나 평면의 판화와 3차원의 조각이 넘나드는 형태로 책처럼 접혀 있다가 조금씩 펼쳐가며 감상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은 지금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방식의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암사슴으로부터 여성이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탄생>을 보자마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르테미스 여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슴은 동물들과 교감하는 힘을 갖고 있는 아르테미스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의 토테미즘적 신화에서도 신성시되는 동물이지 않은가. 작은 암사슴이 성인 여성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은 마치 키키 스미스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면 결국 우리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종교와 신화 속 모티프를 차용한 작품을 감상하며 수직과 수평의 형태로 뿜어져 나오는 탄생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늑대의 배를 가르고 걸어나오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작품인 <황홀> 역시 관람객이 직접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데,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 살려냈던 할머니와 빨간 망토의 우화를 비틀어 직접 늑대의 배를 찢고 나오는 당당한 성인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고 이에 황홀rapture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동판화, 블루프린트 연작과 종이를 이용한 조각 작품 역시 똑같은 빨간 망토 동화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었는데, 동일한 모티프를 활용했더라도 각각의 작품을 바라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동판화와 석판화, 블루프린트 등의 판화 작품부터 시작하여 조각과 태피스트리, 드로잉, 포토콜라주 등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작품들이 놓여 있는 전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스미스가 강조하던 ‘배회하는 움직임’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방랑자가 되어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키키 스미스가 제시하는 우리가 수치스럽거나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대상들, 경계선 내부에 포함되지 못하고 주류 사회에서 이탈된 타자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혐오감과 수치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우리가 내세우는 이분법적 잣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키키 스미스의 작업과 인터뷰 영상을 통해 천천히 나 자신의 경계를 지울 수 있었다.


Figure  1: Kiki Smith, Untitled(Hair). 1990
Figure  2 : Kiki Smith, Free Fall. 1994
Figure  3 : Kiki Smith, Star with Tail. 1997
Figure  4 : Kiki Smith, Born. 2002 / Dominion. 2012


1. <아폴로APPOLLO>에 실린 작가 인터뷰

https://www.apollo-magazine.com/kiki-smith-interview/


2. 키키 스미스, Two, 2002. 동판화 작업 과정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2LHQBzkjw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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