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불평 대신 노력을 해볼까 해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 학원은 문법이 아닌 말하기, 듣기, 쓰기를 가르쳐 주는 학원이었고 그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항상 영어를 잘하는 학생으로 취급받았다. 덕분에 영어를 잘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내 입시 영어 실력은 특출 나지 았았다. 그래서 기초 문법부터 입시학원에서 공부했지만, 모의고사에서 컨디션 좋으면 1등급, 좋지 않으면 3등급을 받곤 했다. 그렇게 나는 영어를 잘하지 않나 보다 생각하고 살았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같은 과 동기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친구가 영어를 1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녀는 영어 1등급을 받았다고 했는데! 역시 수능 영어로 영어실력을 평가할 수 없어. 그래 난 역시 영어를 잘했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교에는 해외에서 살다온 사람들, 교환학생/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영어를 훨씬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나는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태국 방콕에서 인턴을 하면서 영어는 꽤 늘었지만, 방콕에 놀러 온 친구는 태국식 억양탓에 내가 태국어를 하는지 영어를 하는지 헷갈려했다. 졸업 전 처음 친 토익에서 토익점수는 750점, 공부해서 895점으로 졸업하고, 오픽은 한번 쳐서 IH를 받고 졸업했다. 이 점수로도 해외영업을 제외한 모든 직무는 지원할 수 있었지만 취업시장에서 내 영어는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었을 뿐 플러스 요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영어를 잘하는 척'을 할 수 있었던 덕분에 미국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후에 또 다른 미국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영어면접을 꽤나 망쳤지만, 글쓰기는 잘 한 덕분인지 합격했다. 두 번째 미국 회사는 컴퓨터 윈도우를 비롯해 모든 내부 문서가 영어였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읽기, 쓰기 실력은 자연스럽게 늘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검은 머리 미국인이거나, 영어에 유창한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사이에서 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승진을 위한 모든 면접은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포지션에 지원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다녀온 미국 여행에서 나는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직장동료보다 듣는 것은 더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 영어실력은 여행을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정도구나. 비즈니스 회화는 무리가 있다."라고 나 자신을 드디어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전 한국 회사로 이직했고, 회사에서 진행하는 영어회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지원했다. 다음 주 화요일이 첫 수업인데 드디어 초등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영어회화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레벨테스트에서 오픽 IH와 비슷한 말하기 실력을 가졌다고 했다. 어쩜 외국계 회사 6년 근무하는 동안 말하기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은 걸까. 하지만 회사에서 영어로 말을 한 순간이 많지 않으니 이 또한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생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던 내 영어실력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 노력을 해보기로 한 지금, 마음이 편하다. 오히려 설레기까지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더이상 입시나 승진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지적허영심과 내가 좋아하는 컨텐츠를 자막없이(내가 오징어 게임을 이해하는 것 처럼) 오롯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목표가 순수해진 지금에야 드디어 노력이란걸 처음 하게 된다니 신기하고 우습다.
10주 후에 어떤 후기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