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하반기 언론사 공채 자소서를 쓴다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살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글자 수를 맞춰 쓴다고 꽤 고생했다. 그 언론사의 특성에 맞춰 나를 설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 언론사의 항목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매번 기존의 틀을 따르면서도 변형하고, 때로는 새로운 나를 써내려가야하는 일이었다.
떨어졌다는 메일, 혹은 문자를 받는 것은 어찌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덤덤한 척 해도 그날 저녁에는 꼭 맥주한 캔 씩을 먹어야 잠이 왔다. 멀리 서울까지 필기시험을 치고 온 결과거나, 면접관을 마주한 결과는 더더욱 실망감이 오래갔다.
2017 중앙일보 공채 취재기자 자소서 문항
2. 나를 만든 건 8할이 [ ]였다. [ ]안을 채운 뒤, 500자 이내로 설명하세요. (500)
치열하게 고민해야하는 줄만 알았다. 그 나이 그 시절에 나는. 박근혜 정권의 언론 탄압에, 세월호를 탄 아이들의 짧은 생에 마음이 쓰여 조용히 촛불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다가 시간이 갔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나를 만든 건 8할이 부채의식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끄럽기만 했다. 정체모를 죄스러움에 밤잠을 설쳤다. 새벽 1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시급 5000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21살 여학생 앞에 서서 25살의 나는 시간을 멈췄다. 부모가 주는 돈으로 원룸 자취방에서 밥 위에 계란을 올려 입 안에 넣으면서 그 아르바이트생 옆에 쌓인 삼각김밥 폐기물을 떠올렸다. 내가 멈춘 시간들 위에 서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밤새 지우고 지우다 완성된 글에는 그닥 감흥이 일지 않았다. 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지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허함 위에 앉아 계속 썼다. 듣고 경험하고 고민하고 감응해 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필기시험에서 시원하게 떨어졌지만 버스 5정거장을 가는 시간에 금방 써 버린 자소서였다. 성장배경, 장점과 단점 따위가 아니라서 완전히 새로써야 했지만.
그래서인가, 편안하게 술술 써졌다. 나를 만든 8할이 무엇일까. 머리에 떠오른 많은 물풍선 중에 한 개를 가져왔다. 나 대신 학교에 남은 동아리 후배, 길이 달라 도움을 거절한 선배들, 모든 걸 품어주는 부모님 .. 많은 이들에게 내가 가진 짐 같은 것이 있었다. '부채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이상하게 떠오르는 말이 많았고 이는 곧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500자를 맞추는 작업이었다.
작년 12월, 고전 끝에 한 언론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날 둘러싼 상황들을 견디지 못해 나왔다. 그리곤 동네로 돌아왔다. 올해 2월에는 적당한 곳에 앉았다.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쌓여있지만 마주하는 일은 늘 힘들다. 그럼에도 눈 딱 감고 부딪히려 애쓴다. 다 지나갈거야 주문을 외운다.
원래의 나보다 크게 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용을 쓰게 되더라.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다'고 얘기해준 선배에게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다. 피하고 싶어도 부딪히라는 조언이었다. 아니, 협박 같기도 했다. 이건 뭐 돌아설래야 돌아설 수 없었다. 그래도 폭풍같은 시간 속에서 건진 몇 안되는 것 중 하나.
자소서를 쓰면서 나를 정리했다. 쓰다보면 느낌이 왔다. 이 곳은 내 깜량에 힘들겠구나. 여기는 가더라도 나와 잘 안맞겠구나. 하나 둘 소거되면서 온전한 나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열정적이었고 하루빨리 자리잡길 갈구했으며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날이었다.
어떤 선택에도 후회는 없다. 자기합리화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떠나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지난 일을 소회하는 글은 다시 읽어보면 조금 부끄럽다. 변명같기도 하고.
글은 쉬지마라, 선배가 카톡 끝에 덧붙였다. 그 말이 걸려 꾸역꾸역 뱉어낸다. 마음에 안들어도 내뱉다보면 무엇이든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