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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쉐이크 Dec 18. 2022

연구소에서의 일이란

 사무실을 걷다 보면 길게 늘어선 모니터들이 보인다. 다들 숫자와 코드명이 적힌 장표며 그래프 따위를 보며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장표와 도형들과 그래프가 생겨난다. 문득 공장의 노동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의 일은 가히 지식 노동자라 할만하다. 공장의 여공들이 컨베이어 벨트 옆에 앉아 조립을 하듯이 연구소 사람들도 컴퓨터에 앉아 자료를 만든다. 흩어져 있던 숫자들과 그래프를 한데 모으고 솎아내서 새로운 PPT 한 장, 엑셀 시트 하나를 만든다. 그게 오늘의 생산품이다. 그렇게 정제된 문서들은 다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해체되고 이어 붙고 요약되어 다시 PPT와 장표가 된다. 그 장표에는 X70V208465 따위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코드들과 비밀스러운 약어의 긴 리스트를 품고 있다. 참 이상한 종류의 일이다.


 나는 사실 연구소에서 하는 일에서 자동화가 안 된 가내수공업의 향기를 맡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수동으로) 자료를 이어 붙이는 데 사용한다. 남은 시간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정보를 (역시 수동으로) 교환하는 데 사용된다. 이 극도의 비효율이란.


 궁극의 컴퓨터가 있어 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적당히 유추도 해서 데이터를 이리저리 가공할 수 있다면 내가 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없어도 된다. 그러면 아마 연구소에는 몇 명의 결정권자만 있으면 될 거다. 그렇게 정제된 정보가 궁극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컴퓨터가 이를 전파하고, 또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회의와 논의들, 그리고 Re:Re:Re:로 이어지는 기나긴 이메일 덩어리들도 필요 없을 거다. 요컨대 연구소의 지식노동이야 말로 21세기 최후의 가내수공업인 셈이다. 


 나는 이런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구는 늘 새롭기 때문에 자동화가 어렵고, 또 그 덕에 내가 먹고사는 것이겠지마는, 이런 지독한 비효율과 혼돈스러움은 언제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연구소의 일이라는 건 지독하게 관리가 안 되는 공장을 보는 것만 같다. 나사가 부족한데 철판이 쌓이고 있고, 공장 한편에는 냉장고의 문짝을 조립하지만 아무도 배선 조립을 하지 않아 만들다 만 냉장고가 쌓이고 있는 것 같다. 간신히 냉장고가 하나 완성되더라도 공장에는 수없이 많은 나사들과 문짝들과, 조립에 실패해 냉장고가 되다만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는 그런 모양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중복된 실험을 하고, 중복된 자료를 만들고, 잘못 전달된 결과가 복제되고 버전이 나뉘고 다시 같은 일을 중복하고 결국 대부분은 버려지고 잊혀지고 있다. 나는 이 비효율과 정돈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영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만능의 궁극적인 컴퓨터가 아니므로 어쩌랴. 내 작은 영토 안에서 내 작은 일들이라도 정돈되고 체계적으로 맞물려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마는, 늘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연구소의 혼돈에 수줍게 돌 하나를 얹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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