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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영화사 (3)

내가 이렇게 된 이유

by 키네마스코프

솔직히 말해봅시다. 저는요, 영화가 저를 구원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영화를 즐기기 시작한 이 세월을 버릴 수 없다면요. 영화가 저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화에 대해서 엄청난 지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만약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제가 좋아하는 것이 합쳐진다면,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중학교 때 영화를 좋아하던 아이는 결국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감독은 아니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고,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당시, 저는 책에 빠져 지냈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죠. 책을 읽고, 책을 읽었습니다.


시집도 읽고, 고전도 읽고, 소설은 당연히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그 때 당시, 박준 시인의 시집인 <당신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를 가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또 기형도 전집을 선물 받아서, 다 읽고 몇 개의 시들을 노트에다가 배껴 지내곤 했습니다. 소설은 대부분 고전이었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나 <사양>을 읽었습니다.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같은 소설도 봤었네요. 문학 외에도 여러 글을 읽었었는데,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그 때 읽었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무언가 열망이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욕망,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을 뛰어넘어서 글에 대한 염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호해진 미래가 두려울 뿐이지만, 저는 아직도 그 열망에 잡혀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의 탈출구는 영화였습니다. 아직도 자주 가던 신촌 아트레온이 생각납니다. 학교 가는 버스에서, 한참을 졸다가 제 때 내리지 못하고 멀리 간 적이 있습니다. 조금 당황했지만, 오히려 잘 된 것만 같았습니다. 고다르가 말하던가요, 학교보다는 박물관에서 배운 게 더 많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도 많지만, 저는 영화관에서 배운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전에 늦잠 자다가 학교에 지각하면, 쭉 영화관으로 달리는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 앞에서 내리지도 않고 영화를 봤습니다. 조조 영화는 가격이 낮았으니까. 그리고 학생 할인까지 있어서, 영화를 싸게 볼 수 있었다고요. 그리고 11시 정도에 학교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죄책감이 드네요.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습니다. 대학을 문예 창작과로 가고, 꾸준히 글을 썼지만 저는 헤매었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저는 언제나 무용한 것을 즐겼고, 그 무용한 것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무용한 것을 즐겨왔습니다.


먹고사니즘이 지배한 시대에서 저는 탈락한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죠, 평생을 무용한 것만 즐겼던 인간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아직도 무용한 것을 사랑합니다. 대학원에 가게 되었을 때, 저는 제 글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다시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영화 분석을 하게 되고, 영화를 볼수록 영화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논문도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다시 찾아온 순간부터, 저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기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다시 찾아온 것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저를 구원해줄까요? 그건 확신이 없습니다만.


저는 믿을 겁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이 구하는 것이니까.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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