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담킴 Apr 18. 2018

자녀계획에 대하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 전래동화로도 널리 알려진 '선녀와 나무꾼'. 그 환장할 스토리를 간략하게 옮겨보자면 이렇다.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주고, 그 은혜를 갚는답시고 사슴은 노총각 나무꾼에게 '선녀와 결혼하는 꿀팁'을 전수한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샘, 일명 선녀탕에서 날개옷을 하나 훔치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 사슴의 굉장히 1차원적인 조언(장담하건대 사슴은 수컷이었을 것이다)을 나무꾼은 순순히 따른다. 굉장히 많은 갈래의 결말이 있지만 내가 알고있는 버전에 따르면, 사슴은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선녀에게 날개옷을 절대로 돌려주지 말라는 본격 역대급 가족계획 오지랖까지 피운다. 나무꾼은 사슴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또 순순히 그 말을 따른다. 하지만 결국 선녀는 날개옷을 찾아내고 하늘로 냅다 도망가 버린다는, 곱씹을수록 어이가 털리는 줄거리다. 


 

이런 시대착오적 이야기가 지금까지 구전되어 아이들에게 동화책으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경악스럽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건, 아직도 주변에 수 많은 '사슴'과 '나무꾼'들이 존재하며 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하는 '선녀'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가족들부터 방금 처음 본 사람들 마저도 젊은 기혼 여성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족 계획을 들먹이면서 기꺼이 ‘사슴’이 되려 든다. 그들의 이야기를 필터링 없이 곧이 곧대로 듣는 수 많은 남편들 역시 한반도 나무꾼의 후예들답다. 


 

나 또한 결혼 계획을 공개한 이후로부터 줄곧 아이는 몇을 낳을건지, 언제 낳을건지, 성별의 구성은 어떻게 계획했는지 (아니, 심지어 이건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등등 디테일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자녀계획 인터뷰의 대상이 되곤 했다. 결혼식 날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내게 시아버지는 언제 손주를 안겨줄거냐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임신했을 때는 마치 내 배가 마을회관에서 다 같이 키우는 멍멍이라도 된 양 길에서 처음 본 분들도 한 번 '쓱' 쓰다듬고 가기도 하고, 배 모양이 둥그네 넓적하네 하면서 아들인지 딸인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조리원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둘째는 언제 낳을거냐'였고, 아이를 하나 낳아 키우고 있는 지금까지도 둘째와 셋째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기습 오지랖 공격을 받고 있다.  


 

아이가 있는 나도 이러한데, 아이 계획이 없거나 아직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는 더 할 것이다. 매 해 명절, 모든 행사, 각종 모임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이유'에 대한 질문 폭격이 쏟아질테니 말이다. 부부가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는 일은 부부의 성생활과 직결된 일이고, 개개인의 인생 계획에서도 중대한 사항인만큼 엄연히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한민국에서 만큼은 조국의 통일 만큼이나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염원해야 하는 지상과제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심지어 이 슈퍼 오지랖 대열에 '국가'까지 합류했다. 몇 년 전부터 '저출산시대'라는 키워드를 자꾸 들이밀며 아이를 낳지 않거나, 둘 이상 낳지 않는 부부들을 시대의 대역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람이 곧 물리적 노동력을 의미했던 농업성 근면성 시대의 정신이 다시 부활이라도 한 것처럼, 출산과 경제성장을 자꾸 엮어가며 '닥치고 낳아라'고만 외쳐대는데 당사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진짜 출산을 권장하고 싶다면, 방법은 쉽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된다. 왜 아이를 안낳으려 하는지 궁금하다면, 더 쉽다. 그냥 주변을 둘러보면 된다. 아이를 낳으라면서 정작 아이 엄마는 맘충이라고 부르는 모순적인 사회 분위기, 턱 없이 모자란 육아 시설과 제도, 일과 육아 사이에서 쩔쩔 매는 워킹맘들, 핑크로 도배된 임산부석에 떡 하니 앉아가는 임신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분들 등등. 이런 얘길 하면 '나 때는 밭 갈다 N명씩 낳아서 요렇게 조렇게 키웠어! 어디 배부른 소리!'라고 호통을 치곤 하시는, 향수병을 심하게 앓고 계시는 어르신들은 그냥 조용히 그 때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태워드리고 싶은 것이 솔찍헌 심정이다. 우리는 21세기, 2018년에 살고 있다. 그 때와 지금을 같은 비교선상에 둘 수는 없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슴'들께 당부드리고 싶다. 타인의 출산에 제에발 관심 좀 꺼 주시길. 아이를 안낳는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집안엔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둥, 엄마한텐 딸이 필요하다는 둥, 누구도 맘대로 못하는 성별에 대한 참견은 하나마나한 소리란 걸 명심해 주시고. 무엇보다, 아이를 낳는 일은 오직 부부의 문제일 뿐 당신의 인생과 1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주시길. 남편들이 자녀 계획에 대해 떠드는 주변 사슴들의 말에 이리저리 줏대없이 휘둘리는 '나무꾼짓'을 그만둬야 한다는 건, 말해 입아프다. 그리하여 아이를 갖지 않은 기혼 여성들이 모든 사슴들의 뿔을 꺾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고 단단해 질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는 왜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