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릇'이 작다는 걸. 같이 밤새 놀고나서도 쌩쌩한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유독 에너지를 담는 그릇이 작아서 무얼하든 금방 지치고 피곤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성실함과는 멀어졌다. 성실함 역시 에너지를 담는 큰 그릇을 요구하는 덕목이니까. 지금도 아침에 눈떠 출근준비하는 일이 버거운 나는 풀메이크업과 완벽한 드레스업은 커녕, 양치도 겨우겨우 하고 다닌다. 가진 온 힘을 끌어모아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아이를 키운다는 건, 살면서 해왔던 일들 중 단연 '최고 난이도'였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선 나 부터도 씻고, 뭐라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챙겨야한다. 여기에 아이를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 가방을 또 한 짐 챙겨야한다. 아이 가방은 물통, 우유통, 우유, 간식, 기저귀, 물티슈, 가제수건이 기본 옵션이다. 여기에 장난감, 비타민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성실함이 없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생부터 결핍된 성실함을 마른 행주 물 짜듯 쥐어짜내서 외출 준비를 하다보면, 꼭 한 가지씩 빼먹는 것이 생긴다. 그 중에서도, 날씨에 비해 옷을 얇거나 두껍게 입히기라도 한 날이면 외출 내내 세상 오만 사람들의 잔소리가 쏟이지기 마련이다.
"애 쪄 죽겠어!" 혹은, "애 얼어 죽겠어!"
(애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외출 뿐만이 아니다. 아이가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게 미리미리 챙기는 일, 아이가 입을 옷들을 철마다 마련하는 일, 아이가 눈 뜨는 시간에 함께 일어나는 일(아이의 사전엔 주말 늦잠이란 없다), 어린이집의 여러가지 공지사항과 행사를 챙기는 일 등 성실함을 요구받는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다시 태어날 수 없으니, 내가 바뀌는 수 밖에. 혈액형을 바꾸는 듯한 심정으로, 후천적 성실함을 (억지로) 장착한 채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예로부터 '게으름'이라는 개인적 특성은 엄마라는 종족에게만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무조건 바지런해야 하고, 싹싹해야 하고, 꼼꼼해야 한다. 플러스, 요즘엔 범람하는 정보에도 빠삭해야 한다. 온갖 육아 뉴스가 올라오는 맘카페 가입은 필수. '국민육아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장비들에 대한 정보는 모두 세세히 알고 있어야 하고, 무엇이 아이의 어디에 좋고 어디에 안좋은지 가장 최신의 연구결과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어야 기본은 되는 엄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응당 엄마라면 이래야지!'라며 규정짓는 사회의 엄격한 잣대, 그리고 이 잣대에 자신을 통과시키려는 엄마들 스스로의 칼 같은 자기검열이 콜라보 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나 부터도 아이를 갖기 전엔, 엄마들은 '당연히' 성실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되고보니, 내가 가진 그릇은 여전히 작고 육아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요구된다. 아이 엄마가 되었을 뿐, 나 자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니 솔직히 괴롭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다. 워킹맘이라고 해서 '육아를 위한 성실함 탑재하기'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하러 다닌다는 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엄마로서의 사명감이 막중해진다. 결과적으로 일과 가정에서 두 배+a의 성실함을 발휘해야 그나마 중간은 가고 기본은 하는 엄마가 된다. 이러나 저러나, 모든 엄마들은 그저 '엄마'라는 원죄 하나로 '성실함'이라는 바윗돌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의무와 책임이 아빠에게 반만 옮겨가도 훨씬 가뿐할텐데, 세상은 여전히 엄마에게만 세모눈을 뜬다. 감히 말해본다. 엄마도 편한 게 좋고, 눕는 게 좋고, 빈둥대고 싶다. 오죽했으면, '똑똑하고 게으르게' 아이를 키우자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엄마의 역할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만 느슨해지고 둥글어질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