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엔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최대한 갖추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고통이 상상할 수도 없이 크거나 자신이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을 때엔, 더욱 섬세하고 사려깊게 다뤄지곤 한다. 전쟁이나 불의의 사고, 자연재해로 인한 희생자를 진심으로 기리고, 경사는 못챙기더라도 조사는 반드시 챙기는 이유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산모들 앞에서도 갖춰졌던가.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강도 중 단연 1위라는 출산의 고통을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산모들에게, 예를 다해 대하는 누군가가 이 사회에 있었던가. 타인의 고통 중에서도 산모의 고통에 한해서만 극명히 달라지는 태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른 고통들이 '당연히 겪지 말았어야 할' 종류의 고통이라면, 산통은 아이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여자가 '당연히 겪어야 할' 종류의 것으로 분류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출산의 과정에서 1순위는 아이와 가정의 행복이요, 여자는 2순위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다보니 아이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하지만 여자의 출산을 수월하게 하는 모든 의료적 행위들 - 무통주사, 제왕절개 등 - 은 자연히 죄악시 된다. 2순위가 감히 1순위를 위협하는 꼴이므로. 그리고 동시에, 산모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자연분만이 강요된다. '나 때는 밭 매다 애 낳았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레전설과 함께.
이 모든 맥락은 '여자는 출산의 주체가 아닌, 출산의 수단'이라는 대전제에서 시작된다. 출산은 여자가 한다. 유치원생도 아는 상식이다. 주체가 여자이므로, 방법을 선택하는 것 또한 여자의 몫이다. 마치 1 더하기 1은 2가 되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 상식은 소용이 없다. 이 사회에서 이미 여자는 출산의 수단이자 저출산 시대의 해결책이다.
나의 경우, 출산을 며칠 앞두고 병원에서 '출산계획서'라는 것을 써오라고 했었다. 희망사항에 '진통이 길어지면 무통주사를 놔주세요.'라고 적었더니, 남편은 '그거 애한테 안좋다던데..'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내가 내 배 아파서 애 낳는 데에 너는 결정의 권리가 없다'고 못박았다. 너무 단호해서였는지 곧바로 꼬리를 내리긴 했지만, 그 장면은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나 보다 아이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생각에, 아직까지도 떠오를 때마다 부들부들 하곤 한다. 이렇게 '산통=여자라면 마땅히 이겨내야 할 고통'이라는 공식은 조용히, 무의식 중에, 하지만 모든 곳에 스며있는 것이었다. 출산 과정에서 여성의 위치를 바로잡기 위한 목소리와 움직임은 최근 들어 조금씩 생겨나고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단단하게 굳어져 온 인식이 쉬이 무너질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근본도 없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또는 가부장제도가 하사한 집 안에서의 위치를 십분 활용하며. 산모의 의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출산방법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는 분들이 자동차가 자율주행을 시작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자연분만을 하든, 제왕절개를 하든, 알을 낳든, 똥을 낳든, 당사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당사자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 유치원생은 물론 어린이집 원생들도 알 것 같은데, 굳이 설명해야 하는 이 상황은 더더욱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