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서 나는 '분석 철학'의 전공자는 아니고(그래서 분석 '철학'은 잘 모른다..), 조심히 털어놓건대 철학을 잘 모른다는 것에 대해 조금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종종 철학 앤솔로지 같은 것을 학부생의 마음으로 읽곤 하는데, 분석 철학에 대한 재미있는 소개글(?)이 있어 번역해보았다. 사실 논문과 지원서 등등 써야 할 것이 매우 많지만 원래 번역은 다른 거 미뤄놓고 할 때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어느 정도 의역이 들어가 있으며, 오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 대환영이다. 아마추어의 번역이므로 학술적 용도의 인용이나 사용을 금지한다. 또한, 강조는 역자의 것임을 밝혀둔다.
이 글은 Nigel Warburton이 편집한 <Philosophy: Basing Readings>(1999, Routledge)에 실린 버전을 참조했다.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
D. H. Mellor
버클리(Bishop Berkeley)는 1710년 <인간 지식의 원칙(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고 지식으로 향하는 길을 막았던 어려움들 거의 전부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즉 우리가 먼저 먼지를 일으키고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버클리의 이러한 언급은 1710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참이다. 사실, 이전보다 지금의 상황이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더 나빠졌다. 한 가지 이유로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지식으로 향하는 길을 막는 어려움들로부터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그 어려움들로부터 즐거움을 느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철학은 무엇보다도 상식적인 것들의 한계를 다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철학은 상식(sense)과 비상식(nonsense)의 경계를 다루어야만 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유머의 문제이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다음의 사례를 보자.
하얀 왕이 마른 풀을 더 달라고 전령에게 손을 내밀면서 물었다. ‘오면서 누구를 지나쳤지?’
전령이 대답했다. ‘아무도요(Nobody).’
‘그래. 이 꼬마 아가씨도 ‘아무도’를 보았다고 하더군. 분명히 그 ‘아무도’는 너보다 걸음이 느리겠군.’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보다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령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아무도’가 당연히 너보다 느리겠지. 안 그랬다면 그가 너보다 먼저 왔을 테니까.’
이 사례가 왜 우스운지, 마치 ‘아무도’가 일종의 존재인 것처럼 그 또는 그녀(‘아무도’는 남성이면서 여성일 것이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왜 비상식적인지 알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물론 이 사례가 우스운 것은, ‘아무도’라는 단어가 어떤 존재의 이름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는 전령보다 느리게 걷거나 빠르게 걷는 어떤 존재가 없었음을 말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한 가지 철학적 분석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루이스 캐럴 류보다 훨씬 더 진지한(그리고 훨씬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비상식적인 것이 있고, 이를 드러내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상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탐지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비상식을 탐지하는 코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철학 자체가 비상식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에 대해 램지(Ramsey)가 말했듯, ‘우리는 먼저 그것이 비상식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했듯, 그것이 중요한 비상식인 척 굴지 말아야 한다.’(Ramsey 1929:1). 나는 철학이 비상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철학이 비상식적 사실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왜 그것이 비상식인지 말하는 일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도’에 관한 농담 같은 것들로부터 적절하게 즐거움을 느껴야 하며, 그런 농담들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것과, 그 농담이 중요한 것인 척 구는 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철학자들이 적절하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몇몇 철학자들이 좋은 철학에 필요한 진지한 유머 감각을 갖지 못하며, 그와 함께 비상식을 탐지하는 코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그것은 심각한 결함이다. 비상식을 탐지하는 코 없이는, 철학자들은 비상식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진정한 위험, (루이스 캐럴과 달리)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 비상식이 중요한 비상식이라고 설득하는 진정한 위험을 떠안게 된다.
수학이 수학자들, 대체적으로 동료들이 비상식적으로 말할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러한 수학자들에 의해서만 읽히고 평가되는 것처럼, 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읽히고 평가된다면 위와 같은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심지어 철학이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읽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지라도, 수학처럼 철학도 관중 스포츠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내 말은, 철학은 예를 들면 시(poetry)와는 다른데, 시의 경우에는 시를 평가하기 위해 시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철학을 평가하기 위해서 당신은 철학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수학을 평가하기 위해서 수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물리학자들이 수학을 사용하듯, 철학을 평가할 생각이 없고 단지 철학을 신뢰하고 사용하는 외부인들이 철학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부인들은 물리학이 수학을 사용하듯 철학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들은 철학이 일종의, 종교에 대한 세속적인 대체물을 제공해 주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구루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봉자들이 구루들에게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유머 감각이다. 유머 감각은 우선, 구루들이 신봉자들을 매혹시키는 권위의 분위기를 띠는 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철학적 구루들이 중요하게 들리는 비상식들을 말함으로써 먼지를 일으킬 때, 그들의 신봉자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는커녕, 구루가 제시한 관점의 심오한 모호성에 더욱더 감명받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주술에서처럼 철학에서도, 잘 속아넘어가는 군중들은 신비함을 파는 장사꾼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재산을 가져다준다.
이 모든 것이 분석 철학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글쎄, 버클리의 은유를 빌리자면, 철학적 분석이란, 내가 제시한 사소한 예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지적인 스프링쿨러 시스템으로, 세계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개념적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기능을 한다. 루이스 캐럴의 ‘아무도’에 관한 작은 수수께끼에서처럼, 비상식이 만들어내는 가짜 신비함을 탐지하고 해소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수수께끼가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바라건대, 그 진정한 수수께끼가 더 잘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로 철학적 분석의 주요한 목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좋은 철학은 항상 분석적인 철학이었다. 분석은 신조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술(technique)의 문제이며, 이는 현대의 분석 철학자들뿐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흄, 칸트와 밀에게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만일 소위 분석 철학을 다른 것과 구분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분석 철학이 분석적 기술을 사용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분석적 기술들을 개발하고 평가하는 데 명시적으로 관심을 둔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분석적 기술들 자체를 목적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이해의 수단으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오로지 수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분석가에게는 항상 분석의 대상이 되는 비-분석적인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석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철학을 제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만으로는 완전한 정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명백하게도, 다수결의 원칙을 수용하는 것은 당신이 누구에게 혹은 무엇을 위해 투표하는지, 그리고 왜 투표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정치적 민주주의자도 민주주의자이기만 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철학적 분석가도 분석가이기만 할 수는 없다. 이는 물론 민주주의가 중요하듯 분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가 (일당체제와 같은) 정치적 비상식과 맞설 수 있듯 분석이 (‘아무도’의 존재와 같은) 철학적 비상식과 맞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느끼며, 왜 그러한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과 달리, 철학자가 아닌 사람에게 있어서 철학적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만일 철학 일반이 사실은 관중 스포츠가 아니라면, 특히 분석 철학이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일단은, 분석 철학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기질을 요구하고 북돋움으로써 그러한 바람직한 기질을 사회에 제공한다. 비상식을 탐지하는 코는 철학에서만 통용되는 자산이 아니다. 유머 감각, 그리고 균형 감각은 정치적, 종교적 광신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찰에 대한 모호한 암시와 대비되는 명시적인 추론적 이해에 대한 강조는 모든 종류의 엉터리 허풍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된다. 진실에 대한 헌신, 그리고 그에 따라(얼마나 고매한 것이건)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아니라 증거를 기반으로 믿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 과학에뿐만 아니라, 지식을 획득하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모든 진지한 시도들에 있어 핵심적이다. 그리고 분석이 주는 이성의 느낌은, 마치 느낌과 이성이 서로 대조되며 우리가 느낌과 이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지 않기라도 하는 양 이성을 희생하여 느낌을 우위에 놓으려는 반복되는 경향에 맞설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나 사회는 분석 철학이 배양하는 기질로만 덕을 보는 것이 아니다. 분석의 결과들 역시 철학 바깥에서 많은 쓰임새를 가져 왔다. 비록 그러한 쓰임새들을 과장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쓰임새들이 철학을 주요하게 정당화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그 응용과는 독립적으로, 철학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수학적 증명과 참의 개념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 컴퓨터의 발명부터, 낙태에 대한 논쟁-이 논쟁은 생명과 인간성이라는 개념에 의존하는데, 이 개념들의 분석은 특정한 종교적(혹은 반-종교적) 도끼를 든 사람들에게 맡겨지기에는 너무 중요하다-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응용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철학자인 사람이건 아닌 사람이건 그 모두에게 중요한 개념들을 명료하게 해 줌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킬 때야말로 분석 철학이 사회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