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대학원생은 대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
내가 재미있게 봤던 예능들 중에는 <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이 아닌 직장인들의 직장생활을 이른바 '브이로그' 형식으로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인 것 같다. 대기업 사원부터 프리랜서까지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출연해서, 다른 사람의 돈벌이를 (비록 예능의 입맛에 맞게 편집된 방식일지라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직장이 있다는 사실도 새삼 놀랍다.
그러나 <아무튼 출근>의 (멋지고 신기한 직업들을 가진) 사람들은 어쩌면 나 같은 인문대 대학원생을 보고 더 놀랍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나는 인문학을 전공하며 박사과정까지 하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이야기를 정말 자주 듣는다. 사실 같은 대학원생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듣는 것 같다. 퇴사한 지 몇 년 후에, 전 직장 선배를 만나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 선배의 신기한+놀라운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 선배는 내가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하자 심지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야... 너... 정말.... 와..."
심지어 다른 분야의 연구자 선생님들도 좀 신기해 할 때가 있는 것 같다("미학과 사람들은 대체 뭘 하는 거에요?"). 이공계열 대학원생들도, 같은 대학원생이지만 인문대 대학원생의 일에 대해 거의 모른다. 인문대 대학원에는 일반적으로 '랩'이 없다는 사실을 상당히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일단 '대학원생'이 직업이라고 가정하면(4대보험은 안 되지만...), 이 정도로 신기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아무튼 출근>에 출연할 만하지 않을까?
아마 인문대 대학원생의 일에 대한 신기함은 인문대 대학원생이 대체 "무엇"을 하며,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를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머지 직업들은 무엇을 하며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가 투명하게 모두 공개되어 있다거나, 그 직업들이 단순하다거나 상상하기 쉽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직업은 직접 종사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밖에서 보는 이미지와는 매우 다르기 마련이다. 개발자, 디자이너, 교사, 유튜버, 회사원... 그 어떤 직업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인문대 대학원생의 직업생활(?) 역시, 직접 종사해 보아야만 아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인문대 대학원생은 무엇을 하며 먹고 사는가? 이것이 이번 글의 주제이다. 미리 밝히자면 대학원마다 사정이 다르고,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은 또 다르고, 전공마다 또 사정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과 대학원생과 미술사학과 대학원생이 겪는 '학계'와, 그들이 이 선택하는 커리어는 매우 다르리라. 이 글을 쓰기에 앞서 MZ세대의 검색엔진인 유튜브에 '인문대 대학원'을 검색해보고 왔는데, 인문사회계 대학원생의 하루라고 보여주는 것도 심리학과 학생의 그것이었다... 거기는 랩이 있잖아요...
이 글은 진짜 순수 인문대 대학원생들, 즉 실험이나 통계를 동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들이 대체 무엇을 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썼다. 이전에 썼던 모든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은 내가 인문대 대학원생으로서 어떤 하루를 보내며 어떤 일을 해 왔는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모든 대학원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문대 대학원생의 학기 중 일상
인문대 대학원생의 직업 생활은 보통 학기 기준으로 돌아간다. 학기라는 시간단위가 너무 내재되어 있어서, 다른 직장인 친구들이 개강과 종강이 언제인지 잘 모르는 것이 어색할 정도이다. 국내 대학을 기준으로 1학기는 보통 3월~6월 말, 2학기는 9월~12월 말이다.
학기 중에 대학원생은 무엇을 하는가?
석사나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면 강의를 듣는다. 재학생들이라면 학기 중에는 아마 끊임없는 발제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교수는 내가 지 수업만 듣는 줄 아나보지?"는 대학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더군다나 교수님들이 보기에 대학원생은 공부가 본업이므로(월급도 안 주면서ㅠㅠ), 엄청나게 많은 리딩과 정리, 발제를 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기특한 일이 아니다.
재학생들은 학기 말이 되면 기말 페이퍼를 쓰게 된다. 보통은 수업마다 하나씩 쓰게 되므로, 적게는 1편에서 많게는 3-4편까지도 쓰게 된다. 기말 페이퍼가 소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해서 최대는 4편에 이르는 소논문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는 것을 제외하고, 돈을 벌기 위한 일로는 보통 조교를 하거나 강의를 한다. 학교 바깥에서는 보통 알바를 하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과외나 학원 같은 사교육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출판 쪽도 있을 수 있고, 아예 투잡을 뛰거나 알바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인문대 대학원의 경우 연구는 대부분 개인연구로 이루어지므로, full time으로 '연구실'에 나와 있어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각자 짬을 내서 다양한 방식으로 부수입을 얻는다.
나의 경우에는 학기 중에 조교, 강의, 알바를 모두 병행하곤 했고, 광고회사 재직 경력을 살려 카피를 써주거나 광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부터 사설 모의고사 문제 출제, 기업 보고서 윤문, PPT 제작, 기업 컨설팅 리서치 같은 잡다한 일회성 알바들을 많이 했다.
인문학 전공 시간강사의 한 학기는?
시간강사의 한 학기는 3월이 아니라 이르면 12월에서 늦으면 2월에 시작된다. 왜냐하면, 다음 학기에 어떤 강의가 열릴지 결정되는 것은 겨울방학 중이기 때문이다. 계약이 만료되었거나 추가 강의가 필요한 경우 공채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는 것까지 생각하면, 겨울방학은 사실상 강사에게 '방학'은 아니다.
일단 어떤 강의를 하게 될지 결정되면 강의계획서를 올리고 수강 신청 현황을 땀을 쥐며 지켜본다.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인데다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에타 등에서 정말 쉽게 공유되기 때문에, 강의평가가 조금이라도 낮은 수업은 폐강되기 일쑤이다. 강의가 폐강되면 그냥 일자리를 잃는 것이다. 폐강되어도 최소임금 같은 걸 주는 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의가 무사히 개강했다면 한 학기의 싸이클은 강의 기준으로 돌아간다. 오리엔테이션-중간고사-기말고사로 이어지는 세 고비를 잘 넘긴다면 학기가 무사히 마무리되는 것이다. 사실 한 학기를 어떻게 보내는가는 그 학기에 몇 개의 수업을 맡게 되는가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학기말(1학기의 경우 6월 초~중순, 2학기의 경우 12월 중순~말)은 미친 듯이 바쁘다는 것이다. 학기말만 되면 학생들이 부러워진다. 너네는 시험 치면 종강이구나ㅠㅠ 강사의 학기는 학생의 성적이 행정적으로 수정 불가능하게 되는 시점에야 끝난다.
나는 솔직히 시간강사의 큰 이점이 방학을 가진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방학 때는 팽팽 놀아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방학에는 행정 잡일에 신경쓰지 않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육아를 해야 하거나 방학에도 다른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경우에는 불가능해진다.
방학 때 이것저것 읽고 공부를 해 놔야 다음 학기의 수업이 업그레이드된다. 그러나 시간강사는 방학 때는 급여를 받지 않는다. 솔직히 진짜 억울한 것은, 시간강사의 급여는 시급으로 계산되는데, 성적처리기간은 급여를 받는 기간으로 제대로 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주를 수업하면 그 뒤 2-3주간은 성적처리를 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는 급여가 사실상 거의 지급되지 않는다(마지막 2-3주가 가장 힘듦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시간강사법이 통과되어서 방학 때도 급여가 지급되기는 하나, 내 경험상 대학은 약 1주치의 급여만 지급했다. (1년에 2주치 추가 지급)
쓰다 보니 시간강사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빡치는 일에 대한 성토가 되었다.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지금 박사 수료생이자 시간강사로, 강의와 수업조교, 박사논문 작성을 겸업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하루 일상은 다음과 같다. 최초공개! 순수-인문학-대학원생의 하루!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인문대 대학원생은 사실상 재택 프리랜서라서 스스로 일상을 잘 조직하지 않으면 온갖 몸과 마음의 병에 시달리기 딱 좋다. 아래 일과는 남편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고착시킨 나의 루틴이다.
10:00~12:00 기상
양심적으로다가 ~12시를 붙이긴 했다. 일반적인 출근 시간 훨씬 이후에 기상하는 것은 분명하다. 일찍 일어나는 날은 10시 정도에 일어난다. 10시에 일어나는 날은 하루가 길다. 주3회 정도는 9시나 10시에 필라테스를 한 시간 정도 배우러 간다.
12:00~2:00 점심, 집안일, 휴식
간단하게 점심을 해먹고 빨래를 한다든지 청소기를 돌린다든지 화분에 물을 주는 등 집안 정리를 한다. 내가 하루에 꼭 지키는 일과 중 하나는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면서 게임하는 것이다. 나의 소듕한 휴식시간ㅠㅠ
2:00~5:00 낮 출근
'출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다. 나는 학교 연구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와 일을 하는데, 일의 영역과 휴식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서 책상에 앉는 일을 '출근'이라고 부른다. 출근이라고 썼다고 해서 내가 어디 나간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나가봐야 집앞 걸어서 3분거리 카페 정도이다.
3시간 동안은 가능한 한 공부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러나 공부 외에 할 일이 많을 때가 더 많다. 수업 준비라든지, 강의 녹화, 학생들의 메일에 답하기, 채점하기 등등... 3시간을 내내 집중하기는 어려운 데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오래 앉아있으면 골반과 허리가 아프다. 그래서 내가 최근에 쓰는 어플은 'Focus Plant'이다.
타이머를 맞춰 두고 그 시간 동안에는 휴대폰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어플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휴대폰을 만지지 않는 데 성공하면 물방울을 주는데, 이 물방울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식물을 기를 수 있다. 나는 주로 45분 집중-15분 휴식의 뽀모도로 싸이클을 돌린다. 물론 매번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휴대폰을 안 만져도 나에게는 컴퓨터가 있으므로....
이 '낮 출근' 시간 동안에 내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일 관련>
- 강의 준비
- 학생 메일 답장
- 채점
- 기타 학교에서 오는 메일들 처리(뭐 윤리교육을 들어야 한다거나 수료증을 보내야 한다거나 등등)
<공부 관련>
- 논문 읽기, 읽으면서 원노트에 요약정리하기
- 읽다가 생각나는 아이디어 있으면 메모해 두기
- 지금까지 써놓은 논문 점검하기
거의 항상 영어 논문을 읽기 때문에 3시간 내내 읽는대도 진도가 그리 빨리 나가지는 않는다.
5:00~8:00 저녁, 씻기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를 하거나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저녁 후 휴식시간을 가진다. 이 때도 보통 게임을 한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이 노는 것 같다. 아마 노는 시간으로는 전국 인문대 대학원생 중 상위 20%에는 들지 않을까? 여튼 저녁 먹고 노는 시간이 좀 길어서 스스로도 좀 걱정이다.
8:00~11:00 저녁 출근
낮 출근과 동일하다. 사실 저녁 먹고 또 출근하는 게 진짜 힘들다. 피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상에 앉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야근 없는 직장인들은 지금 퇴근하고 놀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좀 억울해지고 야금야금 또 놀게 된다. 하지만 가능한 한, focus plant 앱으로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해 본다. 한 페이지라도 읽는 게 안 읽는 것보다 나으니까.
11:00~ 휴식
11시까지 공부한 게 억울해서 괜히 늦게까지 놀다가 잔다. 보통 게임(또) 하거나 유튜브 보거나 책을 본다.
요즘은 눈이 피로해서 가능하면 책만 보려고 한다.
02:00~ 수면
2시에 자면 그나마 일찍 자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썩 권장할 만한 건강한 생활은 아니군...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다.
아마 다른 분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인문대 대학원생의 '커리어'가 어떻게 굴러가는가 하는 문제일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논의의 요지를 벗어나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소 사소한 일상인 데다 나보다 훨 부지런하고 계획적으로 사는 인문대 대학원생이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도 있군 하는 정도로 읽어주길 바라며... 써두고 보니, 나의 하루를 카메라로 찍는다면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논문을 들여다보거나 거실에서 게임하는 두 장면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나름대로 '출근'을 하는 것이긴 한데, 역시 <아무튼 출근>에서는 인문대 대학원생은 불러주지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