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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란 무엇인가? 월튼의 허구 이론


분석미학에서 켄달 월튼(Kendall Walton)의 허구 이론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유용한 이론적 도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술작품은 허구(fiction)로, 또 다른 것은 비허구(nonfiction)로 분류하곤 합니다. 이 분류는 거의 직관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기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흔히 '허구적'이라는 수사는 '거짓'과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모든 허구적 작품이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실화에 기반하는 허구 작품들도 있기 때문이며, 허구 작품의 내용이 우연히 참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이론적으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허구와 비허구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다거나, 그런 구분이 그리 의미있는 구분이 아니라는 회의주의를 채택하기도 합니다. (매트래버스Derek Matravers(2014), Fiction and Narrative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허구를 정의할 수 있으며 허구와 비허구를 구분할 수 있다는 입장이 현재의 분석미학계에서는 보다 주류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의 예술 관행이 여전히 허구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실제로 어떤 작품을 가리켜 '허구'라고 부르고, 그것이 허구 작품이라는 사실이 그 작품의 감상과 이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했다"라는 문장이 신문 기사의 문장일 때와 소설의 문장일 때 우리는 이 문장에 서로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비록 언어적으로는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재현(작품)이 '허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떤 재현(작품)을 '허구'라고 부를까요? 분석미학자 켄달 월튼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을 내놓습니다. 월튼의 허구 이론은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논문들과 발표들을 통해 발전되어 왔습니다만, 그의 허구 이론을 집대성한 저술은 바로 Mimesis as Make-Believe입니다. 분석미학자 양민정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습니다. 한국어판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제법 두꺼운 책입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허구란 무엇인가?"에 대한 월튼의 답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믿는 체하기(make-believe)'입니다. 우리말에서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개념입니다만, 대체적으로 '가장하기(pretending)'나 '상상하기(imagine)'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월튼은 '허구란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소도구로 사용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믿는 체하기 게임'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월튼이 믿는 체하기 게임의 기본적인 형태로 보는 것은 아이들의 놀이입니다. 아이들이 나무 그루터기를 곰이라고 상상하고, 그 곰에 올라타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놀이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아이들이 하는 놀이, 즉 '나무 그루터기가 곰이라고 상상하는 놀이'가 바로 믿는 체하기 게임입니다. 이 때 나무 그루터기는, 아이들의 이 믿는 체하기 게임 안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결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소도구(prop)'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 그루터기가 바위 옆에 있다면, 그 사실 때문에 아이들의 게임 안에서 '곰이 바위 옆에 있다'는 명제는 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월튼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소도구는 그 본성이나 존재로 인해 믿는 체하기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지 지시(prescribe)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월튼이 '지시'라는 조건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이 허구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에 관련한 상상이 실제로이루어지는가의 여부와 무관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걸리버가 실제로 쓴 항해 일지를 읽고 있다고 '믿는 체'하는 독자가 실제로는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걸리버 여행기>는 허구입니다. 독자의 상상이 실제로는 단 한 순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여전히 독자에게 그러한 상상을 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믿는 체하기 게임 속의 참'은 현실 세계에서의 참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게임 속에서 '곰이 바위 옆에 있다'는 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진짜로 곰이 바위 옆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월튼은 전자를 '허구적 참(fictional truth)'이라고 부름으로써 실제 참과 구분합니다.


월튼은 우리가 재현(작품)을 감상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재현을 감상하는 우리의 태도는 '믿는 체하기 게임에의 참여'로서,  일종의 상상 활동이라는 것이지요. 이 때 재현(작품)은 우리가 참여하는 '믿는 체하기 놀이'에 사용되는 소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비너스의 탄생>을 소도구로 삼아서, 그 소도구의 형식과 내용이 지시하는 대로 우리 자신이 비너스가 탄생하는 장면을 직접(실제로) 보고 있다고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비너스의 탄생>은 이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사용되도록 되어 있는 소도구이기 때문에 허구 작품입니다. 또한 이 게임 속에서 '비너스가 조개껍질에 타고 있다'는 것은 허구적 참입니다. 반면 '비너스는 빨간머리이다'는 허구적 거짓입니다.


조금 복잡합니다만,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월튼에게서 허구란 '상상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을 믿는 체하도록 지시하지 않는 것은 허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뉴스 기사는 독자로 하여금 그 기사의 내용을 믿으라고 지시하는 것이지, 상상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허구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월튼의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대부분의 재현이 허구로 분류됩니다. 일반적으로 재현 중에서 허구와 비허구가 구분된다고 여겨지는 것과 달리, 월튼에게 있어서 '허구'와 '재현(representation)'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터너의 <국회의사당 화재>는 런던 국회의 의사당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화재 사건을 터너 자신이 목격하고 그렸다는 점에서 비허구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월튼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캔버스 표면의 물감 패턴을 통해서 감상자로 하여금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는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상상하도록 규정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때 '상상하기'라는 것은 '착각하기'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서 내가 정말로 비너스의 탄생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고, 월튼이 그러한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월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구, 혹은 재현 작품에 대한 감상의 핵심에는 상상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월튼이 탐구하고 있는 '허구'는 '비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구'라는 용어는 흔히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월튼이 탐구하는 '허구'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함의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에 관해서 분석미학자 스테이시 프렌드(Stacie Friend)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때로 철학자들은, 특히 지칭이나 비존재(non-existence)에 대한 특정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영역으로서의 허구에 관심을 둔다. 이는 형이상학과 언어철학의 일반적인 관심으로, 이 경우에는 허구와 실재(reality)를 대조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들은 책이나 영화 같은 허구적 재현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인지적 관여에 관심을 둘 수도 있다. 이는 주로 미학의 관심사로, 이 경우 적절하게 대조되는 것은 허구와 비허구(nonfiction)이다." (Stacie Friend(2012), "Fiction as a Genre", Proceedings of the Aristotle Society)


월튼은 자신이 논의하는 '허구'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님을 상당히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월튼의 허구 개념은 형이상학의 허구 이론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허구적 인물의 존재론과 같은 문제에서 월튼의 이론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번역본의 두께로 가늠할 수 있다시피, 월튼의 이 허구 이론은 상당히 방대합니다. 조악하고 거칠게 요약했습니다만 월튼의 이론이 가지는 큰 의의 중 하나는, 분석미학 이론이면서도 동시에 'big theory'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이론은 탁월하게 명료하며 정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허구의 본질을 치밀하게 파헤치고 있으며, 허구에 연관된 다양한 연구가 의존할 만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허구에 관한 연구의 논의 범위를 시각예술에까지 넓힌 것은 중요한 의의입니다. 허구와 재현 예술에 대한 분석미학적 연구들은 사실상 월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월튼의 이론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에 살펴보고 있는 가상현실에 관한 논의들 역시 월튼의 허구 이론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월튼의 허구 이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국내 연구는, 제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월튼을 회화적 재현의 견지에서 다루는 연구에는 강선아(2005) "월튼의 회화적 재현 이론에 관한 비판적 연구"가 있고, 양민정의 논문들 중에서도 월튼에 대해 설명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번역본이 잘 나와 있으므로 직접 뛰어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월튼의 이론은 '해제'가 필요할 만큼 난해하지는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월튼의 믿는 체하기 이론에 대한 짧은 가이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국내에서 허구에 대한 분석미학적 연구 결과물로는 윤주한 2020 서울대 미학과 박사학위논문인 A Theory of Fictional Art 있습니다. 온라인에 공개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석미학에서 허구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지를 꼼꼼히 서술하고 있는 논문입니다. 윤주한은  논문에서 독자적인 허구 이론인 '샌드박스 이론' 제시하고 있는데, 아마 정리하여 학술논문으로 출판될  같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습니다만, '샌드박스 이론' 월튼의 이론을 계승하되 발전시킨 '-월튼주의' 정도로 부를 수도 있을  같군요.  논문의 심사위원   사람이 월튼 전문가인 스테이시 프렌드라는  역시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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