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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돕기 Jul 22. 2016

자아성찰.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보고..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 그가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조금 더 깊이 따져보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철학은 자연을 중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던 것이 중심이었으나, 소크라테스를 기점으로 너(인간)를 알아야 한다는, 즉 인간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되는 변혁이 이루어진 셈이다. 인문학적 사고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준법정신이 뛰어났는지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죽음을 택한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국법, 재판관, 의원 등이 아니라 지혜있는 소수의 정신적 열망이라는 것을 강조한 그의 말은 그의 준법정신을 넘어 더 깊이 고려할만한 숙제를 남기는 기분이다.


오늘 날(비단 오늘 날 뿐이겠냐만은) 사회를 구성하게 만드는 필수적 조건은 '법 체계'이다. 성문법의 시작, 그리고 그 이전부터  시민 사회의 '법' 약속의 존재 없이는 국가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법은 사회적 약속이라는 가치를 넘어서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을 '교육'시키는 기능도 갖는다. 행위의 악을 '잘못'과 '범법'이라는 것을 통해 규정할 수 있도록 하며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이 "젊은이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국법, 재판관 등이라고 대답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연유로 '법'이 아니라고 했을까. 악법도 법이라며 지키던 준법자가....... 개인적으로 그가 대답했던 소수의 정신적 열망이라는 대답에 대한 성찰을 해본다면, 결국 막스베버적 논리로 (지식인의) 신념윤리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본다. 막스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정치가 차원에서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었고 베버는 정치가의 책임윤리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나, 지식인과 정치가의 차이는 그 영향력과 직업적 특성에 있다고 본다. 정치가의 신념은 때에 따라 독일의 나치와 같은 집단을 만들 수도 있기에 책임 윤리를 강조하겠지만, 지적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지식인에게 '신념'은 '책임'보다 더 중요하다. 신념은 한 개인의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위한다. 어릴 때부터 법의 중요성과 '준법정신'을 배운다 한 들,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배경, 그리고 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지식 등을 총체적으로 판단해 스스로 쌓아지는 개인의 신념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념을 기반으로 한 지식인들의 정신적 열망, [인간으로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인간의 근본은 무엇인가?] 등의 철학적 지식이 젊은이들을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라 본 것은 아닐까? 지키지 않으면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차원의 법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서, 인격체로서 정신적, 지적 타당성을 얻고 논리적으로 수긍하게 만드는 지식과 지혜의 우수함을 높게 평가했다고 본 것이 아닐까?


이런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는가?


지식의 습득과 습득된 지식을 성찰하는 일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생각과 사고는 서로의 비판과 논의를 통해 확장을 이룰 수 있다. 새롭게 자라나는, 소위 한창 배울 나이인 사람들만이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 연령대에 있는 사람들, 모든 사람은 늘 교육이 필요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에게 성찰할 꺼리를 던져주는 건 오늘 날 지식인의 역할이 아닐까? 과거,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던 광장은 그 의미가 바뀌어 만남의 장소로만 여겨질 뿐이다. 진리 탐구의 전당이라 불리던 대학조차 이제는 침식된 자본을 막을 길이 없어 보인다. 칼 마르크스처럼 위대한 사상가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것을 보면 지식인에게도 자본의 유혹을 버틸 맹목적인 버팀목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식인의 신념적 윤리는 사람들에게 지적 총량을 늘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이지 않을까.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독서의 호흡이 짧아지고 인문사회 학문이 퇴화되고 있는 오늘 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더 무거워져만 간다.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의 원인은 이성보다 앞선 감정적 충동 행위라 보는 한 사람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지속적인 성찰과 공동 선의 전파와 같은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소수의 정신적 열망. 비단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정신적 열망을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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