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30대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미래를 촉망받는 관리자입니다. 성과를 내고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성실히 일합니다. 그의 후임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직책에 맞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좋은 집에 살며, 바쁜 중에도 아이들과 아내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합니다. 아내와 함께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둘은 함께 보냈던 아름다운 여름 휴가지를 회상하며 언젠가 또 그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를 기도하지요.
아내 또한 행복한 가정을 위해 헌신적입니다. 아이 세 명에게 자연을 누리는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남편의 직장은 그들이 사는 그림같은 집과 벽 한 면을 면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삶, 아름다운 삶, 이상적인 삶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딱 한 가지만을 제외하면요. 남편의 직업이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라는 점 말입니다. 바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야기입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실존인물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총책임자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을 다룬 영화입니다. 홀로코스트 주제가 수없이 많은 예술 작품에 등장하고,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 또한 많이 다루어졌지만 이 작품은 또 다른 새로운 관점과 감상의 길을 트이게 해주었습니다.
영화는 내내 정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을 다룹니다. 부부 사이의 약간의 말다툼 정도가 제일 큰 분란인 잔잔한 일상, 하지만 그 일상의 벽 하나 건너에는 산 채로 불에 타고 독가스에 질식되어 절규하며 죽어가는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일상입니다.
이상적인 가족과 성실한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구역질이 날 만큼 불편한 혐오의 감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정말 놀라웠습니다. 아니, 때로는 누군가의 건실함과 가정의 안위를 꾸리는 성실함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더욱 증폭시키고 강화한다는 것에 소름 돋는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이 슬프고 괴로운 훌륭한 영화를 보면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품가가 가장 비싼 생존화가이기도 한 리히터는 90이 넘은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꾸준히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는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60년대의 작품을 꼽고 싶습니다.
리히터는 193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는 곧 그의 유년시절이 나치와 세계 대전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리히터는 열세 살이 된 어느 날 영국과 미국 비행기 3,600대가 드레스덴에 50만 개가 넘는 폭탄을 투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두 삼촌은 전쟁에서 죽었고 그의 아버지는 군에 복무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리히터는 그렇게 히틀러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두 개의 전체주의 정권을 겪었고, 두 거대한 역사의 칼날은 리히터 가족의 삶에도 깊숙히 들어와 절대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내었습니다.
흑백으로 촬영된 듯 보이는 사진 속에 나치 군복을 입은 한 남성이 서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루디 삼촌>입니다. 리히터의 삼촌은 바로 나치 장교 출신이었습니다. 나치 부역자라는 역사의 한 파편, 그리고 동시에 리히터의 가까운 혈육이었던 평범한 한 남자.
그 남자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시대의 한 복판에서 마치 소중한 추억의 어느 시절처럼 활짝 웃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하지만 모두가 아는 그 제복을 입고 웃고 있는 삼촌을 바라보는 리히터에게는 과연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스쳤을까요. 그 또한 흐려진 작품처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작품 <마리안네 이모>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12살의 어린 나이였던 리히터의 이모가 14개월 아기였던 그를 안고 웃고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는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이는 나치 정권에서 열등한 유전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치가 행했던 병자에 대한 안락사 프로그램인 유티나지아에 의해 강제 불임수술을 받은 뒤 8년간의 투약 실험 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시절. 그 끔찍한 기억도 흐릿한 사진, 아니 사진과도 같은 그림 속에 담겨있습니다.
사실 이 두 작품은 모두 사진이 아니라 회화입니다. 그는 가족 사진을 회화로 그대로 재현한 뒤 물감이 다 마르기 전 의도적으로 붓으로 쓸어버림으로써 작품을 마치 블러 처리가 된 사진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잔인하리만큼 또렷했던 역사를 흐릿한 붓질로 박제한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았던 자신의 삼촌, 하지만 역사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그의 직업은 작품과 함께 시간의 흐름에도 계속 기억될 것입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속 루돌프 회스처럼요.
폴 리쾨르는 그의 저서 <기억, 역사, 망각>에서 '기억이 역사의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며, 모든 기억은 망각과 얽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기억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을 통해 선택되고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어찌 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의 망각의 기억입니다. 하루에 수백 명은 불태워 죽였던 진실의 역사를 지우고 지극히 성실히 꾸려갔던 행복한 개인의 삶의 기억입니다. 이렇듯 가해자들은 언제나 망각하려 노력하고, 피해자들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게 싸워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거대하고 처참한 비극을 작품으로 다시 마주하며 우리가 '절대로 저지르면 안 되는 일'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망각으로 인해 블러처럼 흐려지려 하면, 다시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선명한 감각으로 재생시켜 줍니다.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우리가 만에 하나 혹시 회스처럼, 혹은 루디 삼촌처럼 평범하고 무심하게 일상으로 악의 역사를 쓰고 있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자문하자고, 그리고 그 나쁜 기억이 흐려지려 하면 끝없이 이것을 다시 되살려 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