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su May 29. 2023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를 꿈꾸며.

단주 30일째, 나는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졌다.

되돌아보건대 술과 나 사이의 역사는 열렬하고도, 지난하고도 끈질겼다. 


2009년 이른 봄이었다. 갓 20살이 된 나는, 난생처음 얻은 3평 남짓의 서울의 자취방 침대에 앉아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대학 주택가 골목으로 난 반쪽짜리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오후의 햇살과 소음이 들어오고, 미니 냉장고의 컨버터가 드문드문 요란하게 울면서 적막을 갈랐다. 개강은 아직 사흘이 남았고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였던 엄마는 생업이 바빴다. 짐을 풀어줄 틈도 없이 서둘러 집에 내려갔다. 오도카니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완벽하게 낯선 공간이었다. 완벽하게 혼자였음을, 그것이 앞으로의 일상이 될 것임을 생각했다. TV를 켰다. 사람들이 떠들고 웃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슬펐다. 다리가 아파 절뚝거리면서 싼 방, 그중에 그나마 안전한 방을 같이 찾아다니던 엄마가 슬펐다. 망친 수능이 슬펐다. 원치 않는 대학이었기에 기대되지 않는 대학생활도 슬펐다. TV를 껐다. 마음도 같이 끄고 싶었다. 고시원 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소주를 한 병 사 왔다. 드라마에서 봤던 건 있어서 병나발을 불어봤다. 술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혼자 마시는 건 처음이었고, 어쩐지 그 한 모금은 진짜 씁쓸했다. 서늘하게 가라앉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날것의 외로움이 조금 마비되는 것도 같았다. 한 병을 다 마시고 잤다. 그게 시작이었다. 


시간이 무한히 내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듯했다. 소비하고 낭비하고 게걸스럽게 흥청망청 써도 될 것 같았다. 청춘의 특권이었다. 청춘은 동시에 괴팍했다. 예민한 마음은 작은 사건에도 터질 것만 같고, 감정은 늘 전속력으로 솟구쳤다. 발 딛고 선 자리는 좁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에너지는 넘치고 확신은 궁핍했다. 생각이 턱 끝까지 차서 들이쉬는 숨들이 모두 불안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가진 건 젊음뿐이라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은 그런 무력감이 일상이었다. 잘 될 거야, 뭐 라도 될 거야라고 자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 시절, 술은 언제나 내 위로이자 친구였다. 매일같이 마시고 웃고 떠들고 울었다. 그러면서도 집에 돌아오는 길엔 아무것도 해결한 것 없이 술 먹고 놀기나 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밤이 길었다. 2학년, 첫 이별을 겪었던 그 해 여름방학은 나 자신도 질릴 정도로 술을 마셨다. 술 먹고 자고 일어나면 또 마셨다. 놀라운 건 그런 나를 내가 정말 싫어했다는 점이다. 어디 한번 어디까지 싫어할 수 있나 두고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어떤 의무인 것처럼. 방학이 한 달 남짓 남았던 어느 날인 것 같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술을 끊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한 나, 망쳐버린 첫사랑, 꼬일 대로 꼬인 관계. 나는 그저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치정과 주정을 벗어나 의미 있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술을 끊었다. 


공부를 했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학점도 올랐다. 원하던 학교로 편입을 했다. 편입한 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졸업 전에 좋은 조건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인생의 첫 실패, 수능을 망친 후로 찌들어 살았던 열패감, 패배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조금은 내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속에 단단하게 중심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방심했다. 이십 대 후반,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고생했으니 주는 보상처럼 느껴졌다. 일상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아, 이제 건강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자만했다. 한껏 입을 앙다물고 몰입하고 긴장하는 하루가 끝나면 맥주 한 잔 걸칠 때 따뜻한 기운이 몸에 퍼지는 그 알딸딸한 느낌이 좋았다. 경제력이 생기면서 맛있는 안주에도 눈을 떴다. 술이 다시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내 매일은 소진되는 일상이었고, 그 끝에는 술이 있었다. 처음 한 잔은 기분 좋게 긴장이 풀렸다. 두 잔은 맛있었다. 세 잔부터는 관성이었다. 세게 타고난 주량이 뒷받침이 됐다. 내 할 일 잘하면서 이 정도는 건강한 게 아니냐고 자위하던 것이 습관이 됐다.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다시 제자리였다. 2,3일 빼먹을 때를 제외하곤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33세, 그 사이 이직을 하고 몇 번의 승진을 하고, 결혼을 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사회의 1인분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나는, 주말이면 낮술을 하고 주말이 지날 무렵 쌓인 술병과 캔을 배우자에게 보이기 민망해 서둘러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하는, 여과 없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되었다. 지난한 음주의 세월과 함께 실패도 많이 쌓였다. 실패의 패턴은 이러하다. 

1.    어느 주말 낮 나는 반절쯤 남아있던 술을 (때로는 와인, 때로는 위스키 -) 한 병을 다 비운다. 

2.    후회한다. 집에 술을 사다 놓지 않고 며칠을 버틴다.(2,3일?)  

3.    회사에서 재앙을 겪고, 영혼까지 소진된다.  

4.    퇴근길에 생각이 방향을 튼다. 아니 한 잔만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드라마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주로 포차 씬이나 파인 위스키 바 씬) 나이트캡, Relaxer 같은 예쁜 단어들이 떠오른다. 편의점에 들른다. 

5.    그날은 적게 먹는다 맥주 한 캔? 다음날도 적게 먹는다. 그다음 날에는 어제보다는 많지만 그래도 적게 먹는다. 

6.    적게 (하지만 매일) 먹는 패턴을 유지한다. 주종을 바꾸기도 한다.  

7.    (다다음 또는 다음) 주말이 됐다. 마음이 풀어진다. 그리고 주말 허용치를 넘는다

8.    반복.
 

패턴은 똑같다. 첫 잔은 행복, 두 번째 잔은 그간 쌓인 약간의 관대함, 셋넷다섯…. 그 후엔 빈 병을 볼 때의 식상한 - 당황스러움. (이걸 내가 다 먹었다고?) 그럴 때면 나를 동여맨 가장 무거운 닻이 술독에 내려져 있는 것 같다. 그 닻은 집에 술이 있는지 없는지를 매번 파악하게 만든다. 있다면 먹을까 말까를 매번 저울질하게, 만든다. 그리고 먹을까 말까를 한 열 번 하다가 먹게 되면 몇 잔을 먹을까를 저울질하게 만들고, 그것이 결국 몇 잔으로 귀결되었을 때 미운 나를 때리는 채찍이 된다. 나는 또 나 자신이 못 견디게 미워질 지경까지 왔다. 여과 없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알코올중독자인 나는 밉다. 미워하다 보니 아끼지 않고 더 함부로 대한다. 악순환. 자아는 두 갈래로 끊임없이 분열한다. 한쪽은 그만 마시라고, 과음한 나를 혼낸다. 헐레벌떡 건강한 음식을 먹게 한다. 기억력이 감퇴되면 어떡하나 매 순간 걱정한다. 몸이 무거워진 느낌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비난한다. 또 다른 쪽의 나는 파괴하는 나다. 더 마시라고. 그냥 마시고 잊으라고. 그러면 오늘만 마시라고. 오늘도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그보다 술 마시는 삶이 뭐가 나쁘냐고. 적게 마시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남들 다 마시지 않느냐고. 그냥 복잡하고 힘든 인생 편하게 살자고. 

 
 끔찍한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술과 술 마시는 나를 미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 왔다. 늘 한 발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언제 마음의 준비가 될까를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이 쪽으로도, 저 쪽으로도 가지도 못하는 채 안절부절못하면서- 다른 삶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어디까지 나를 미워할 수 있나.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주말에 아마도 그 끝에 다다른 모양이다. 여느 때와 같은 패턴이 - 문득 그게 너무나 못 견디게 지겹다고 느껴진 순간 -  변화를 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된 것 같았다. 반쯤 남은 술병을 땄다. 싱크대에 버렸다. 아쉬움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한 달 전 이야기다. 그 후로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을 처음 끊는 것도 아닌데 지금이 처음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마실 수 있는 술은 이미 내가 다 마셔버렸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고, 나는 적당히 – 또는 건강하게 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전엔 술을 참는 기간을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야”라는 확신을 얻기 위한 기간으로 썼었다. 언젠가 건강하게 술을 즐길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잠시 떨어져 있는 기간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연인이 초반엔 열렬히 사랑하듯 – 나도 다시 탐닉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이젠 안다. 나는 마시지 않는 기간에도 알코올중독자였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마시지 않더라도 의존할 수 있다. 중독될 수 있다. 이제 그런 “적당한” “건강한” 음주는 나와는 관련이 없음을 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인정하건대, 나는 중독에 취약하다. 섭식장애, 담배, 술 – 을 겪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아마도 유전적 성향과 후천적 성향이 합쳐진 형태인 것 같다. 나는 주사도 없고 겉으로 보기엔 자기 관리도 잘하는 고성과자다. 웬만해선 주량을 넘겨 과음하지 않는 기능성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 적극적으로 나를 말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나는 나만이 도울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나를 구하고 싶어서 쓴다. 단주 30일째, 단주 일기를 쓰는 지금, 나는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