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su Jun 11. 2023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오랫동안 술이었다.

단주 43일째. 

한 시인이 썼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많은 지갑도 나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중략 …. 

이문재 – [밖이 더 많다] 중에서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오랫동안 술이었다.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 가까이 흘러가는 지금, “바깥에 더 많은” 나는 조금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지난밤 마신 맥주 캔이 쌓여 있던 주방 아일랜드 식탁이 깔끔하다. 피곤해서, 귀찮아서 등의 핑계로 늘 설거지거리가 들어앉아 있던 싱크대가 깨끗하다. 맥주 냉장고로 쓰던 김치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과 과일이 빈자리가 종류별로 (정말로 필요했다- ) 들어차 있다.


뇌가 습관을 인식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21일이라고 하던가. 매일같이 편의점으로 달려가고 싶은 첫 달이 지나가고 나니 술을 참는 저녁이 이제는 좀 익숙하고 전처럼 힘들지 않다. 힘들 땐 검색엔진에서 “금주 효과” “금단현상” 같은 것들을 찾아보고 뭐든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동기를 충전했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읽었던 흔한 긍정적인 효과들을 실제로 체감하고 있다. 수면의 질 상승 – 체중 감량 등등 흔한 것은 차치하고, 가장 많이 느끼는 건 “지금 하지 뭐” 의 순간들이다. 


술 마시던 때엔 아침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날아가는 오전 시간을 버티고 나면 허기에 허덕거리면서 국물 있는 점심을 (급하게) 먹었다. 카페인을 때려 넣고 오후 업무를 하다 보면 네 시 즈음엔 방전이었다. 피곤하고 성마른 마음으로 지옥철을 타고 집에 가는 것도 일인데 집에 가서 집안을 돌볼 여력이 없는 건 당연했다. “오늘은 힘드니까 내일 해야지” 하는 게 일상이었다. 매일같이 허덕이는 직장인의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리 만무하지만, 일상에서 술을 빼고 나니 조금은 삶이 편해졌다. 오후 네 시에 체력이 남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는 싱크대를 볼 때, 꾹 눌러 담으면 하루는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쓰레기 통을 볼 때면 선뜻 “지금 치우지 뭐” 한다. 


시간은 똑같이 주어지는데 쫓기는 느낌이 덜하다. 체력이 남아서인지, 어제 마신 술을 만회해야 다는 자의식에 시달리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피곤을 핑계로 덮어두고 있었던 것들을 조금씩 들춰볼 힘이 생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돈이 줄줄 새고 있던 유료 구독들을 정리했다. 몇 년째 쌓인 사진 파일도 정리했다. 바쁨을 핑계로 소원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고, 덜 조급하게 대화를 나눈다. 요 며칠 전에는 대담하게도(?) 퇴근하고 서점에 들렀다. 당장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목을 축여야 한다는 갈망이 없어지고 난 자리는 한 뼘 더 다채롭고 여유롭다. 


술이 없는 일상 속에서 나를 만드는, 내가 읽고 쓴 것들, 새로 찾은 산책길, 우려낸 따뜻한 차와 정돈된 공간. 바깥에 있는 나는 매일 하루만큼씩 더 무해하고 괜찮아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를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