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해석, 스포 주의, 곡성 결말)
불친절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은 굉장히 불친절한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곡성의 스토리 전개는 뭔가 장면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몰입도는 최고이다.
왜 개연성이 낮은 스토리 영화들이 혹평을 받을까? 그 이유는 결국 영화에 대한 몰입감으로 귀결된다. 스토리에서 개연성이 없고 불친절하면 영화에 대한 몰입감이 깨지니까 "아 뭐야 스토리도 개판이고 짜증나네 "라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곡성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영화에 홀린듯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느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그런 영화였다.
이게 곡성이라는 영화의 엄청난 강점이다. 분명 불친절한 영화인 건 맞는데 그걸 전부 뛰어넘는 몰입도를 지닌 영화. 물론 개연성이 없는 장면들을 상쇄시키는 장면이나 중간중간 영화 스토리를 조금 더 매끄럽게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쉽지만 그 아쉬움을 삼키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곡성의 내용, 결말에 대한 해석.
정말 많은 해석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영화이다. 큰 줄기에서 해석을 써보자면 일단 일광(황정민 역)과 외지인이 한 패이다. 그리고 무명(천우희 역)은 이에 대항하는 토속신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포인트를 집기 위해서 타 블로그 곡성 결말 스포 라는 글에 있는 주제들을 일부 참고해서 적어보겠다.
1. 왜 종구(곽도원 역)의 가족인가?
이건 영화를 꿰뚫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종구는 일광에게도 마지막에 무명에게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 가족입니까? 왜 내 딸입니까? 이유는 그냥이다. 이에 비유해서 영화에서는 낚시로 설명하고 있다. 미끼를 던졌을 때 무엇이 그 미끼를 물지 알고 던지는가? 아니다. 그냥 던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낚이길 바라면서. 그냥 그런 것이다. 이는 크게 보면 인간의 불행과도 연관되는 내용이다. 왜 나에게 불행이 찾아오는 것인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라고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원래 불행이란 그런 것이다. 이유 없이 소식 없이 찾아오는 그런 것 말이다. 느닷없이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왜 나여야만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네가 그 자리에 그냥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참 영화가 잔인한 메세지를 던졌구나. 싶긴 하다.
2. 일광과 외지인의 관계.
뭐 앞서도 말했지만 둘은 한 패이다. 외지인은 악마이고 일광은 악마의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걸 알고 영화를 다시 본다면 영화가 완전 다르게 보인다. 제일 처음 일광이 종구의 집에 가서 했던 행동을 기억하는가? 집안을 뒤집어놓으면서 장독대에서 죽은 까마귀를 꺼낸다. 이 죽은 까마귀의 의미는 아마 무명이 쳐놓은 외지인에 대한 결계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다. 그러니까 일광은 종구의 집에서 불행을 걷어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집을 지켜주고 있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다 부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악마의 힘이 활개치기 좋으니.
중반까지 굉장히 모호하게 둘의 관계를 풀어냈으나 마지막에서 확실하게 일광과 외지인의 관계가 나오게 된다. 종구의 집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 장면, 그리고 이제껏 찍은 사진(초기에 외지인의 집에 붙어있던 사진들)을 일광이 가지고 있는 걸 보여주면서 일광과 외지인이 한 패였음을 관객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는 장면?
3. 무명은 누구?
무명은 그 지역을 지키는 토속신 혹은 수호신 정도로 보면 된다. 그녀는 외지인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인다. 처음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금어초 결계'를 기억하는가? 이게 바로 엔딩장면에서 중구의 집에서도 발견된 '금어초 결계'이다. 물룬 중구가 집으로 들어가면서 결계는 깨지게 된다. 아마 첫번째 살해현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무명은 엔딩장면에서 머리핀이나 옷과 같이 피해자들의 물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견된다. 중구는 이를 발견하고 무명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무명의 역할을 보았을 때 이는 피해자들의 물품을 지님으로써 뭔가 보호를 해주고 있었다고 해석하는게 타당할 것이다.
4. 논란의 살굿장면.
정말 많은 논란이 있는게 바로 이 살굿장면이다. 여러 장면이 교차편집되면서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먼저 일광의 살굿은 효진(중구의 딸)을 향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뭐 실제로 감독도 이러한 발언을 했으니 이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외지인의 굿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고 또한 외지인은 일광의 살굿을 받은게 아니라면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는가? 등의 여러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외지인의 굿을 기억하는가? 외지인은 박춘배(피해자 중 한 명)의 사진을 두고 주술을 펼친다. 그렇다면 이 주술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이 박춘배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는 주술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영혼을 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지인은 박춘배가 차량에서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진을 이용해 주술을 펼쳐 그 박춘배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변수가 등장한다. 갑자기 박춘배가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박춘배가 살아있음으로써 외지인의 주술은 실패하게 되고 이는 살굿에서 일컫는 '역살'을 맞게 된다. 그래서 고통스러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외지인에게 '역살'을 날린 장본인은 누구인가? 라고 하면 결국 무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명이 어떠한 방법으로 박춘배를 좀비로 되살렸고 이에 따라 외지인은 '역살'을 맞게 된 것이다.
외지인이 역살을 맞은 뒤 박춘배의 트럭으로 가서 박춘배가 없음을 보고 굉장히 당혹스러워 하는 장면과 숨어서 좀비가 종구의 친구들을 공격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장면으로 미루어보면 박춘배가 좀비가 된 것은 외지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이러면 또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무명은 수호신이고 토속신이다. 분명 선(善)의 입장일텐데 좀비를 만드는게 말이 되냐?
말이 된다. 최초의 전제를 깨버리면 말이다. 무명은 선(善)한 존재가 아니다. 이런 전제를 세우면 모든 톱니바퀴가 맞아 떨어진다.
무명은 자신의 지역을 위협하는 외지인(악마)을 내쫓거나 없애는게 제 1의 목표이다. 자신의 지역에 있는 생물(인간을 포함)을 보호하는건 부차적인 일이다. 박춘배가 좀비가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통해 외지인(악마)에게 '역살'을 날렸으니 무명의 목적은 성공한 것이다. 마지막에 종구를 도와주려하는 장면도 결국 금어초 결게를 통해 악마를 잡고자 하는게 주된 목표이지 종구의 가족을 모두 살리는게 목표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5. 영화는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믿을거야? 안 믿을거야? 라고 말이다. 이 믿음 장면의 백미는 바로 무명과 종구가 만났을 때 집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닭이 세 번 울기를 기다리느냐의 장면이다. 무명은 믿음을 강요한다. 나를 믿어라. 저들은 악마이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이곳에 있다. 나를 믿으면 악마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종구는 인간이다. 결국 종구는 무명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가게 되고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닭이 세 번 울기를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에 무명과 종구가 처음 만났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종구는 그 곳에서 무명이 사라지고 악마의 형상을 갖춘 외지인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마치 악몽이었던 것처럼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무명은 이 장면을 두고 그게 정말 꿈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종구에게 묻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무명의 어떠한 행위 (결계)로 없었던 일이 된 것이다. 아마 닭이 세 번 울기를 기다렸다면 이 끔찍한 종구 가족의 죽음도 악몽으로 바뀌어 없었던 일이 되는게 아니었을까?
조금 더 세밀한 영화 장면 분석을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로 가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는 해석이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5170
곡성에 정답은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계속해서 던진다. 영화 자체는 중구의 시각에서 바라본 중구의 신념에 따라서 흘러간다. 마지막 중구가 무명을 믿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을 때 중구의 선택은 틀렸지만 납득이 가는 선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화 내내 틀린 선택은 없었다. 결과가 그러했을 뿐.
이렇게 쓰면서도 나도 잘 모르겠다. 곡성은 정답이 없는 영화다. 영화 내내 그러했듯이 영화가 끝나고 그냥 그 영화를 본 우리는 우리가 믿는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석한대로 영화를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곡성은 내 생각에 최소 2회는 봐야하는 영화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1회차를 봤다면 이제 다시 영화관으로 가서 이러한 모든 정보들을 습득하고 영화를 바라보자. 그럼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나름의 정답을 찾아보자. 다시 말하지만 곡성에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p.s 주연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더 좋았던 영화이다. 특히 중구의 딸 효진역을 맡은 아이의 연기력이 대단했다. 이런 곡성의 엄청난 몰입감 뒤에는 주연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있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