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공감을 위하여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을 다룬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를 기억하시나요? 영화에서 화가 베르메르는 창 밖에 떠 가는 구름을 가리키며 하녀 그리트에게 묻습니다. “무슨 색이지?” 그리트는 잠시 생각하다 노란색과 옅은 푸른색, 그리고 회색이라 대답합니다. 흔히 보는 구름은 흰색이기 마련인데, 그리트는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설명하려는 NLP와 관련이 있습니다. :)
몇 년 전 한 드레스가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 드레스인지 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 드레스인지에 대한 논란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뜨거웠습니다. 결론은 드레스 메이커 측에서 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 드레스라 밝히면서 일단락되었지요.
제 친구도 포토샵의 스포이드 툴을 찍어가며 설명하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는 우리에게 신기한 해프닝 정도로 끝이 났지만 여기에는 재미있는 시사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보는 세상의 객관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내 눈앞에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 드레스가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며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도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보는 것과 정확히 같은 흰색과 금색의 드레스로 보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제가 우리를 다투게 합니다.
아니 너는 어떻게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 드레스)를 (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 드레스)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여기서 ( ) 안 문장을 빼보지요.
아니 너는 어떻게 ( )를 ( )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이런 짜증 섞인 말, 한 번쯤 해보지 않았나요?
흰 금과 파검의 경우는 너무나 극명하게 다른 결과라 이렇게 큰 논쟁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극도로 다른 결과가 아닌 소소한 다름들이 우리를 얼마나 많은 오해와 반목의 틀에 갇히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같은 흰색과 금색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과연 같은 색을 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각자의 개개인이 받아들인 빛의 파장이 신경을 자극하고 이것이 뇌의 프로세스를 거쳐 우리가 바라본 색으로 경험됩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가 인식한 색은 각자 다르게 경험됩니다. 마치 휴대폰 카메라가 삼성이냐 애플이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에 덧붙여 우리는 아래에 있는 모든 색을 '금색'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까지는 금색이고 여기부터는 흰색이라는 위치에 선을 그어보세요.
딱 잘라 쉽게 그을 수 있나요? 그리고 그 위치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우리 눈은 심지어 왼쪽 눈과 오른쪽 눈도 미세하게 색온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안과 선생님께 물어보세요)
눈으로 보이는 것도 이럴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그보다 훨씬 제한적인 언어를 통하여 대화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은 오해가 기본입니다.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알아?'
'나는 미안함을 충분히 표현했는데 못 알아듣는 네가 이상한 거야'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이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사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언어가 사과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앞선 글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담긴 언어를 사용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어에 담긴 마음)
요리를 배우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과 꿈꾸는 것을 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나에게는 비슷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렘을 이야기한 사람에게 꿈꾸는 것을 하는 즐거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용한 언어에 바로 내 마음이 담겨있기에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해 줄 때 우리는 내 마음이 더 정확히 알려졌음을 경험합니다. 오해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해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글에 서두에 한겨레 기사의 앞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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