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카인을기리며
오늘 새벽에 현대 최면으로 유명한 제럴드 카인 선생님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네요.
제가 빚을 진 멘토 분 중 한 분이시기에 마음이 아주 아픕니다.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고인을 기리는 의미로 제럴드 카인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럴드 카인이 주유소에 차를 대고 잠깐 커피 한잔 마시면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물차 한 대가 탈탈거리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차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더니 주유소에 거의 다 들어와서는 그대로 퍼져버렸습니다. 차에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내려서 보닛을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저것 연결하다가 할머니를 불러서 "나와서 이것 좀 잡고 있어봐라. 내가 시동을 걸 테니까."하고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어요. "부릉!'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는 순간 엔진이 폭발해버렸습니다. 밖에서 엔진을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는 그대로 불덩이와 같이 날아가 나동그라졌어요. 화상에 타박상에 출혈도 있었겠죠. 그리고는 공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위에 불씨가 날아다니고 팔과 몸에도 화상을 입어 정신이 쏙 빠진 거죠. 할아버지도 같이 공황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한쪽에서 보고 있던 제럴드 카인이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집어던지고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할머니에게 막 뭐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공황 상태에서 발광하시던 할머니가 점점 진정이 되더니 제럴드 카인을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거예요. 잠시 뒤에는 할아버지도 옆에 앉히고 셋이서 할머니는 누워 있고 두 남자가 옹기종기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심지어 껄껄 웃으면서 911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대요.
도대체 제럴드 카인이 무슨 말을 했기에 할머니가 통증에서 벗어나서 웃으면서 구조대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만약 그런 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해보세요. 심각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버렸다면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진정이 될까요? 불안할 때 누가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으세요? 사고를 당했을 때. 누가 무슨 말을 해주면 안심이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의사 선생님입니다. 제럴드 카인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의사가 아님에도 "진정하세요. 내 말을 들으세요. 저는 의사입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막 혼비백산하던 것을 딱 멈추고 제럴드 카인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최면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주의 집중을 빼앗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탁! 오감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 모든 초점을 모으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 상황에서 "나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데. 이 사람을 속여도 될까?" 이런 윤리적인 고민 탓에 "저기요. 제가 사실은 의사는 아니지만 제 말씀 좀 들어보실래요?" 이러면 듣지 않고 계속 발광을 했겠지요. 도와주고 싶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럴드 카인은 달랐습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한마디로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어 귀 기울이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지실 수 있어요. 내가 보니까 그렇게 아플 정도는 아니네. 놀라서 그렇지."라며 안심시키는 말을 했습니다. 몇 마디 말로 공황에 빠진 사람을 진정시킨 것이지요.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인지적 자원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건물에 불이 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순식간에 강의실이 메케한 연기로 가득 차고 한쪽에서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제가 문을 탁 열면서 "이쪽입니다!"라고 외치면 대부분 사람이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고 막 뛰어나가겠지요. 그와 같습니다. 예시 속 할머니 또한 제럴드 카인이 진짜 의사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인지적 자원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담은 그의 말이 내적으로 수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적 허용이 일어나면 경험이 따라옵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가만히 있어 보세요. 생각만큼 아프지 않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어보니까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아까는 통증에 공포까지 높아져서 몇 배로 아팠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 경험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타인의 제안을 허용하고 그 결과 경험이 일어나면 그것은 내적 사실이 됩니다. 최면가의 제안에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아 진짜 그렇게 아프지 않네!"
아무튼, 그렇게 진정이 되고 난 후 911구조대가 왔습니다. 구조대원이 신고를 받고 와서 할머니를 실어가려고 들것을 내렸는데 보니까 황당한 거예요. 온몸이 다 화상에 피가 철철 나고 엉망진창인데 미소를 띠고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황당한 거죠.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때 할머니의 정신은 하와이로 가 있었어요. 제럴드 카인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요? 남편분 때문에 그런 것이니 남편분께 보상을 받으셔야죠. 무엇을 해달라고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니 할머니가 "하와이에 가고 싶네. 우리가 신혼여행으로 다녀오고는 한 번도 못 가봤지 뭔가. 당신 큰일 났어. 이제 내가 바라는 것 다 해줘야 해."라고 말하며 신혼여행 이야기부터 해변에서 있었던 사건들, 꼭 가봐야 할 맛집 등을 꼽으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놀란 구조대원은 저도 모르게 "아니 어떻게 된 거지? 이 정도 상처면 죽을 만큼 아파야 정상인데?"라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의 최면이 깨졌습니다. 구조대원이라는 맥락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와이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죠.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면서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앞선 저의 칼럼을 읽은 신 분이라면 이 이야기가 많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게 하는 최면적 현실 창조와 제럴드 카인의 이 예시는 놀랍게도 맞닿아있습니다. :)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위 일화는 저의 책 '최면 심리 수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에릭소니언 기본 과정을 무료로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