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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답 Sep 15. 2017

첫날 밤

무이네 한 달 살기

침대에 누워서 해변 일출을 보는 생활을 기대하며 숙소를 잡았다. 밤에는 파도와 바람이 으르렁대는 소리를 서라운드 5.1채널로 듣게 될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우기라더니 바다가 매섭다. 


어제 오후에는 서울에서 드라마 <아르곤>을 보고 있었는데 오늘 밤엔 열흘 전까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곳에 와 있다. 금요일에 사표를 내고 그 다음 월요일에 무이네 행을 결정했다. 백수의 유일한 특권, 오라는 데는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다. 막상 여기까지 와놓고선 아무래도 심드렁하다. 


호치민에서 무이네 오는 버스에서 책 <여행을 팝니다>를 좀 읽었다. 부제는 '여행과 관광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이다. 신이현의 <열대 탐닉> 같은 게 아니라, 왜 하필 이런 책을 여기까지 가져왔을까 후회했다. 물론 책은 드물게 훌륭하다.


"......여행 기사는 점점 '경험'을 보도하게 됐다. 기자는 버마에 관해 그렇게 많이 알 필요가 없었다. 버마를 방문한 경험을 좋은 이야기로 풀어놓은 재능을 보이고, 밤에 놀 장소를 잘 조사해서 추천하면 그걸로 족했다.

(...) 하지만 여행과 관광산업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큰 그림과 그 변화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여행을 팝니다>, 43쪽 중)


무이네의 해변은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 업소나 식당을 통하지 않으면 아예 접근이 어렵게 돼 있다. 이렇게 긴 바닷가가 죄다 사유지 비슷하게 돼 있는 건 처음 본다. 물론 지역민들이야 다 방법이 있겠지만 어쨌든 지역에서 가장 좋은 해변가에서 주민들은 밀려난 것이다. 바다와 바로 붙은 호텔 수영장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어쩌라는 건지. 인간이 어정쩡하면 피곤하고 꼴사납다.


무이네 한 달 살기 일지를 기록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가벼운 것이었다. 요새 유행에 편승해 삼시 세 끼 뭘 먹었는지나 어떻게 유유자적했는지 정도나 적어봐야지 했던 건데 이 책을 읽으니 갑자기 그게 잘못 같다. 내가 여행 기사를 쓰려던 것도 아니고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인 저자처럼 저널리스트 정신이 투철하지도 않건만 그저 마음만 불편해졌다. 덩달아 TV를 켜고 베트남어가 아닌 유일한 채널 BBC나 CNN을 틀면 로힝야족 난민들이 사는 천막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노스 코리아, 미사일, 유에스, 사우스 코리아...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혼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싶으면서 덜컥 외로웠다. 외롭다는 기분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결국 외로움을 느끼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다가 나가서 밥을 먹으니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끼니는 역시 중요한 것이다. 고민하다 캐리어에 김치를 담아 오지 않은 게 아쉽다.


혼자 여행하는 걸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 처음 생각한 게 4년여 전이다. 그리고 또 혼자 떠나고 그러느라 남을 섭섭하게 만들기도 하고, 떠나서 외로워도 하고 다시 혼자 떠나기의 반복이다. 관성이 그렇다. 무이네에서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만 사람 드문 곳 같아 녹록치 않을 것 같다.


무이네의 바다는 서해와 비슷한 분위기인 것 같다. 해 지고 도착했 바다를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해 뜨고 보더라도 이국적인 경관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동남아에 올 때는 사실 초록빛 바닷물 같은 것에 대한 기대가 없잖아 있던 건데 잘 알아보지 않고 없는 걸 바란 모양새다. 호수 레이크 맥콰리만큼 아름다운 곳은 세상에 더 없을 것만 같다. 사실 그리운 곳은 거기였는데 대신 무이네에 오니 레이크 맥콰리가 더 깊이 그리워졌다. 무이네를 떠나고 나면 여기도 또 그리워지려나.


나는 과연 약속한 원고를 다 마치고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해야 할 일 하나도 결국 하지 않고 여기까지 가져왔다. 이놈의 미루기, 벼락치기 근성은 내 인생이 끝날 때에야 같이 끝날 것이다. 일단 미루고 오늘밤은 <진격의 거인>이나 마저 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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