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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답 Sep 18. 2017

해에게서 소년에게

무이네 한 달 살기, 넷째 날

눈을 감으면 태양의 저 편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내게 속삭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 어른이 될 시간이야 너 자신을 시험해 봐 길을 떠나야 해


초딩 때 내게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넥스트의 곡이라기보다 만화영화 라젠카 노래였다. 만화 내용은 다 잊었지만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라젠카 세이브 어스' 멜로디를 떠올리면 지금도 설렌다. 저 가사처럼 어른이 될 시간이니 나를 시험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다짐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잠 깨는 게 쉬워진 나이가 됐다.


나흘 째 무이네에서 첫 일출을 맞자 마자 간단히 이곳과 사랑에 빠졌다. 해가 떠오르고 질 때 빛이 얹히면 어디든 특별해진다. 사람들이 일출과 일몰에서 황홀함을 느끼는 건 본능에 각인된 게 아닐까. 태양 에너지 덕택에 나도 모두도 살아 있고 지구가 돌고 있으니 태양님이 가까울 때 경배하라, 뭐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리. 


밀물 때라 해변 산책은 하지 못하고 요정의 샘물Fairy Stream을 찾아갔다.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입구가 있어서 매일 산책 가야지 계획했었는데,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엘프가 튀어나와도 이질감이 없겠다 싶은 곳들도 있긴 했으나 이름이 과했다. 그저 바닥이 모래고 물이 발목 정도까지만 차서 맨발로 걷기 좋은 개천이다. 감탄할 만한 구석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무이네에 온 사람이라면 한번은 들를 수밖에 없겠지. 


요정의 샘물 끝 폭포까지 갔다가, 허탈한 기분으로 산길로 빠져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 어느 집에 한국의 장독대 같은 것들이 쭉 늘어서 있는 걸 보았다. 냄새도 한국 장 담구는 것과 비슷했다. 뚜껑이 베트남 전통 모자 '논'처럼 생겨서 설핏 웃었다. 호치민에서 논을 하나 샀는데 쓰고 다니면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웃으면서 쳐다 보거나 말을 건다. 현지 여성들은 흔히 쓰고 다니던데 외국인이 쓴 건 나도 아직 못 봤다만 흔치 않은 일인 걸까. 어쨌건 나도 기분이 좋고, 논이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햇빛을 잘 막아줘 열심히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일몰 때. 어부가 모래 위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는 중이다. 널따란 해변에 사람이 참 드물다. 다들 어디 가 있나, 사막에 가 있나, 애초에 없나. 나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호텔 수영장에 몸을 담그지 이곳 바다에는 잘 안 들어가는 것 같다. 파도가 세기도 하고 인적이 없으니 왠지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물이 푸른 빛이 아니라 덜 내킨다. 서핑하기엔 좋아 보인다.


발에 감기는 모래가 곱고 수평선이 탁 트여 웅장하고 시원하지만, 해변 산책도 유쾌하지만은 않다. 워낙 넓은 만큼 더럽다고 할 순 없어도 깨끗하지 않다. 어부들이 물질도 하는 곳이다 보니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흔하고, 역겨운 거품들도 곧잘 보인다. 해변 숙박 업소들과 식당, 마을에서 나오는 오염수를 다 바로 바다로 흘려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이런 풍경들을 마주치는 데엔 중독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있을까. 어느 낯선 데를 가도 정은 쉽게 붙는데 가장 오래 살던 곳은 떠나고만 싶으니 팔자가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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