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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u Ivana Kim Mar 16. 2022

할머니와의 두번째 만남

96세 꼬마의 해맑은 미소에 33세 아가 엄마도 덩달아 웃었다.

할머니를 만난 뒤로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계속 벤치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어제는 주영이가 등원을 일찍해서 할머니를 뵈지 못했는데, 마음 속에 계속 도시락을 열심히 드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오늘도 집을 나서며 같은 벤치를 지났을 때 안 계신걸 보고는 "어쩌면 이제 다시 못 뵐 수도 있겠지?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주영이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 


멀리서 보이는 광장에 앉아계신 할머니의 모습

오늘은 비가 내리던 엊그제와는 달리 감사하게도 햇살이 따스한 봄 날씨이다. 어린이집에서 나오면 아파트 단지 사이로 커다란 광장과 놀이터가 있다. 보통은 등을 지고 반대 방향으로 지나쳐가지만 오늘 따라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때 나의 머리 속에 남았던 할머니의 형상이 아주 멀리서 보이는 것이다. 거리가 꽤 있는데도 할머니 라는걸 한 눈에 알아차렸다. 회색 잠바를 입은 백발의 할머니. 오늘 단지 내 장터가 열렸는데, 강냉이를 가져와 드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내 눈에 꼭 띄도록 할머니를 광장으로 보내주신 것만 같았고, 마음이 기뻤다. "집에 반찬 해둔 게 뭐가 더 있었더라..미역국은 다 먹었는데.." 내 머리 속에 바로 들어온 생각. 그렇지만 그 생각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 바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할머니는 계속 광장에 계시겠죠? 마땅히 풍족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할머님께 드릴 음식을 주님께서 마련해주세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국 종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커다란 팬에 남은 계란찜과 냉장고에 도토리묵 반토막과 미나리 한줌, 주영이 먹으려고 사둔 하얀 물 김치가 보였다. 오늘은 간식 거리로 곡물 과자와 ABC 쥬스도 함께 챙겼다. 나오려고 보니 '말씀향기' 전도 미니 책자가 생각 나서 그 책과 남편에게 선물로 주려고 사 둔 목수건 하나도 도시락통에 함께 넣었다. 지난번에 마스크를 안 쓰고 계셨던게 생각나 여분의 마스크도.      

과일 주스와 곡물 과자

이제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계실 거라는 확신이 들어 더 이상 조급하게 뛰지 않았다. 이미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발견할 수 있도록 눈을 돌리게 해주셨고, 그를 돕기 전에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를 하니 마음이 한결 안정이 되었던 것이다. 

도착하니 여전히 할머니는 계셨고, 나를 보시더니 또 웃으시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셨다. 드시던 강냉이 한 줌을 나에게 주시려고 했다. "할머니, 어제는 우리 못 만났네요. 오늘은 아침 드셨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 놓으셨다. "아니, 오늘 아침 못 먹고 나와서 이거 먹고. 내가 빨리 가야되는데 안 간다고 며느리가 하도 타박 안 하노..가야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 나는 굶고 계시면 혼자 계시나 했는데,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있으신 것 같았다. 그리고 지난번 처럼 도시락을 꺼내어 드렸다. "할머니 오늘은 국이 없어요. 그래도 반찬이랑 한 끼 드시겠어요?" 할머니는 또 어디서 가져왔냐며 고맙다고 바로 드시기 시작하셨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다 비우시고 배부르고 따듯하다고 해맑게 웃으시며.. 보통 이 정도 연세 되시면 밥맛이 없을만도 하실텐데 잘 드시는걸 보면 건강하신것 같았다.   

말씀 향기 전도 책자와 마스크, 스카프

그러고 있는데 멀리서 또 다른 할머니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시고 계신 것이다. 조금은 젊어보이셨는데, 할머니를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알고보니 할머니를 작년부터 경로당에서 알고 코로나로 모임이 중단 되자 밖에서 나처럼 끼니를 도와주고 계셨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나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주셨다. 할머니 성함은 무엇이고 연세는 96세시며, 안동 출신이시고, 지금 어디서 사시는 분인지 까지..도와주시는 분이 이미 계셨고, 가족까지 있다고 하시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치매가 있으셔서 예전에 아래 층 택배를 잘못 가져오셔서 경찰에 신고까지 당하셨는데 그걸 이 할머니가 겨우 막아주셨다고.. 이유는 할머니도 모르고 하신거지만, 무엇보다 같이 사는 가족이 상처받을까봐 걱정 되셔서였다. 아들이 비닐 하우스 일이 잘 되지 않고 집안이 어려워져 누구도 할머니를 잘 챙겨주지 못하고 있는거라고..그래서 항상 집에 안 계시고 이렇게 나와 계신다고 설명해주셨다. "할매, 앞으로 다른 사람꺼 절대로 가져오면 안된다고 내가 그랬지?" 라고 다시 한번 말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가져온 책자와 스카프는 절대로 주지 말라고 하시며.. 집에 가지고가면 가족한테 혼이 나신다는 거였다. 주스와 과자도 지금 이 자리에서 드시도록 드려야 된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ABC 주스에 적힌 글자와 그림을 보시더니 젊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봉투를 뜯고 원샷을 하시고는 곡물 과자도 스스로 열어 맛있게 드셨다. 마스크는 내가 가져온걸로 갈아주시는걸 젊은 할머니께서 도와주셨다. "그래도 애기엄마가 먹을 것도 주고 마스크도 이래 깨끗한걸로 주는기가 할매, 고맙지?" "엉. 고맙지 고맙고말고.." 배꼽 잡게 웃겼던 것은 이 젊은 할머니가 이러한 훈계를 하실 때마다 백발 할머니는 뒤에다 삿대질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못됬어 못됬다구 라고 나를 보시며 립싱크를 하시다가 그 할머니가 뒤를 돌아다보면 싹 표정이 바뀌시며 '밥은 드셨어?' 하며 웃으시는 것이다. 이 할머니가 잔소리가 많으셔서 미운정이 드신것 같았다. 마치 숨바꼭질 하는 장난꾸러기 꼬마 같은 모습.. 귀엽고 사랑스러운 치매가 걸리신건지.. 


오늘도 할머니는 내가 멀어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인사해주셨다. 젊은 할머니는 내가 돌아가는 길에 같이 걸어가시며 애기 엄마도 할머니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96세 할머니보다 젊어서 이렇게 표현하는 거지만, 이분도 무려 85세 이시다. 당신 몸도 편치 않지만 이 할머니가 걱정 되셔서 매일처럼 나와서 지켜보고 계시다고.. 얼마나 더 많은 날들을 만나뵙고 음식을 드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과 행동이 예수님 안에서 어제와 오늘 처럼 계속 인도하심을 받아 할머니의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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