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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K Feb 26. 2023

서울여행.  아프지만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잊으면 잃어버린다  






일주일간 미친 듯이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서울시내라 하면 나에게는 낯선 곳이다. 요즘은 서울시내가 강남인지 사대문 안인지 헷갈린다. 서울 시민이었을 때 내 머릿속에 기억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곳의 배경은 강남 뿐이었다. 그래서 사대문 안은 낯선 곳이었다. 그리고 유쾌하지 않은 곳이었다. 한강을 넘자마자 복잡해지는 길과 낡은 건물들, 지저분한 시장골목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가는 그런 곳이었다. 광화문, 보신각, 낙원상가, 인사동, 종로 3가 이 정도가 내가 아는 곳의 전부였고 그곳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역사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인 것 같다.  왜 관심이 없었을까? 국사 과목은 결코 어린 나에게는 재미있을 수 없는 과목이었다. 어려운 한문 단어들과 날짜와 연도를 외워야 하는 그야말로 외울 것이 너무나 많은 귀찮은 과목이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 옛날이야기들이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알면 알수록 찝찝해지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연어가 회귀하듯이 자연스럽게 그런 옛날이야기들이 궁금해질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쌓여 많아지는 만큼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지도 모른다.


광화문 앞에 섰다. '화'자는 될 화자로 빛과 같이 널리 퍼져 백성을 유교적 깨달음에 이르게 하라는 뜻이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법궁으로 만든 경복궁의 첫 대문의 이름이어서 강렬함이 느껴진다. 저 안쪽 근정전에 계시던 임금의 덕이 빛이 되어 광화문 밖으로 쏟아질 듯 한 이름이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궁궐, 1867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지만 1910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전되어 틀어진 방향, 1997년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 해체와 원래 방향으로의 복원 등 조선 법궁의 첫 문은 그렇게 부침이 많았다. 아픈 이야기는 근정전을 돌아 건청궁 곤녕합에 이르러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가슴을 뚫어버린다.  







캄보디아 씨엡립에 가면 가난을 테마로 한 투어가 있다. 배를 타고 수상학교에 가는 여행인데 배 주위로 양동이를 타고 뱀을 목에 건 아이들이 몰려와 구걸을 한다. 배는 물에 떠있는 학교를 둘러보게 해 주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이 손으로 강물을 떠마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갑자기 남의 나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서울의 명소들을 둘러보고는 이건 역사적 수치심을 테마로 한 투어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성왕후 시해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이어진다. 지금 현재의 대통령이 서소문에 있는 다른 나라 공관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면 여론의 반응은 어떨까?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중명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곳 중구 정동에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생겼다는 우스개 소리에도 마음은 가벼워질 수 없었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창덕궁에도 아픈 기억은 여지없이 도사리고 있었다. 헌종 때 지어진 낙선재가 그것이다. 갑오개혁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의 손자 영친왕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인조의 삼배구고두례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어린 나이에 인질이나 다름없이 일본으로 유학의 명목으로 끌려가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왕실의 왕후와 결혼하고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일본육사 출신의 준장이 되어 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완벽한 경계인은 완벽하게 양쪽으로부터 버림받고 1963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서 살다가 죽은 곳이 낙선재다.


가장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했던 곳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다. 북촌한옥마을은 멋진 뷰 포인트에서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부분의 한옥들이 1930년대 형성된 것들이어서 서로 어깨를 비비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한옥다운 곳을 보기 위해서 남산골 한옥마을에 갔다. 1860년대 정도로 시대를 올라가 서울 이곳저곳에 흩어진 한옥들을 모아 재건해 놓은 곳이었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을 시작으로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까지는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된 것이 인상적인 한옥의 특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부부가 같이 살아도 남편은 문과 가까운 사랑채에 기거하고 아내는 부엌과 붙어 있는 안채에 기거한다. 서로의 역할 분담과 영역분담이 확실하다. 과거에는 벽이 있고 문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남녀유별이 부부사이에도 확실하다. 안채에 있는 사람이라 안사람이라고 했는지도 모르지만 서양식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부러운 구조였다. 아파트는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흩어져 있어 서로의 동선이 겹치면서 모든 움직임이 열려있는 구조라 독립적인 삶이 어렵기 때문이다. 안과 밖이 없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관훈동 민 씨 가옥에 이르러서다. 솟을대문을 지나자 궁궐인지 사가인지 헷갈릴 정도다.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예사롭지가 않았다. 대청마루는 거의 운동장 수준으로 으리으리하다. 거기다가 대청공간의 높이를 2 고주 7량 방식으로 높여 놓았다. 궁궐에서나 쓰는 구조다. 아니나 다를까. 민영휘는 구한말 친일 문신으로 나중에는 일본의 헌병대 사령관을 거쳐 자작 작위까지 받은 자다. 또 찝찝함이 밀려왔다.


이어서 본 제기동 윤 씨의 재실은 어떤가. 한옥에서 집 안에 재실이 있는 구조는 처음 보았다. 재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한 사가를 말하는데 이곳은 순종이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재실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을 만들고 그 옆으로 화계(花階)를 만들었다. 이 집에서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재현해 놓은 한옥 마당에는 돌을 쌓아 올린 틀밭 형태로 나무를 심어 놓은 정원이 눈에 띄었다. 화계는 보통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궐에서는 본 적이 있다. 왕가의 화계로는 경복궁의 교태전 후원, 창덕궁의 대조전, 주합루 화계와 낙선재의 화계가 대표적이다. 조선 최초의 민간 정원인 담양의 소쇄원에서도 화계식으로 처리된 계단식 후원을 볼 수 있다.


화계는 자연 경사 지형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 그 장소의 특성에 따라 만든다. 식물이나 괴석, 석조, 굴뚝 등 구성요소들도 다양하다. 때로는 위엄과 단조로움을, 여인이 머물던 교태전 같은 곳의 화계는 다양한 식물로 화려한 색을 더한다. 화계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단을 통해 위계와 질서를 보여주는 매력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또 정신이 버쩍 드는 한 방을 맞는다. 해풍부원군 윤 씨는 윤택영으로 순종의 장인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마지막으로 본 집은 옥인동 윤 씨의 가옥이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계단식으로 점점 높아지는 곳의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ㅁ'자 형식으로 지붕의 높이를 달리 구성한 한옥이다. 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네모난 프레임에 액자가 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보았던 한옥들과는 다르게 매우 폐쇄적이다. 기둥머리에 궁궐에서난 볼 수 있는 익공을 보는 순간 또 불안감이 밀려왔다. 앞에 보았던 윤택영과 혹시 같은 집안인가?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옥인동 윤 씨는 윤덕영이다. 윤택영의 형으로 동생보다 한 술 더뜨던 사람이다. 친일행위로 받은 증권의 가치는 지금 돈으로 약 230억 정도인데 그 돈으로 옥인동 일대에 땅을 사들이고 집을 지었다. 만 여평 부지에 건평 6백 평의 유럽식 건물을 지어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리던 벽수산장의 건물주다. 그리고 이 집도 그 일부다.




조선은 사대부가 모여 그 이데올로기로 유교를 택했다. 출가를 하는가 하면 윤회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불교와 산속으로 은둔하는 도교를 멀리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 후로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을 놓쳐 결국 망하고 만다. 그것도 아주 찝찝하고 찜찜하며 치욕적으로. 오늘의 서울은 어떤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는가. 다시 돌아와서 1년 반 남짓 지켜본 서울의 이데올로기는 돈과 외모였다. 윤택영과 윤덕영이 오히려 부를 이루는 롤모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즘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춥다.'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은 을사년 같다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후 날씨가 꾸무럭하여 쓸쓸하거나 스산할 때 쓰는 말로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백 년이 지나도 그 찝찝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잊으면 잃어버린다. 그래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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