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은퇴생활
새벽 4시.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조용한
설날 아침이었다. 불 꺼진 아파트 건물을 등지고
여행가방의 플라스틱 바퀴는 유난히 큰 소리를 내었다. 무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깨울 기세였다.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를 타 본 것이 언제였더라.
아 벌써 1년 반이 넘어버렸네. 그래.
이제라도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게 어디냐.
감사하자 감사하자……
하지만 공항에 도착한 후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하물 달랑 15kg을 부치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역시 남들 놀 때 같이 노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남들 놀 때는 집에서 놀고,
남들 일할 때는 돌아다니면서 놀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고생이다.
여행이라는 TRAVEL이 고생이라는 TRAVAIL에서
온 말이라도 했다. 돈도 더 많이 든다.
하지만 이번엔 이것도 감지덕지다.
가끔은 결핍을 맛보아야 할 이유다.
티웨이 항공 오전 출발편만 15편이다. 다낭, 오사카,
나리타, 치앙마이, 세부, 칼리보, 후쿠오카,
삿포로, 나리타, 오키나와......
그래 나가자 나가.
어제 보았던 경복궁, 청계천, 광장시장에 깔린
한류를 사랑하는 외국인들이여
우리는 이제 자리를 비워드리리다!
인천 - 치앙마이
이제 LCC는 더 이상 LOW COST가 아니다.
치앙마이 왕복티켓이 675,000원.
15KG 이상 위탁 수하물은 킬로당 17,000원.
미리 식사 주문하면 앙뜨레 하나 만원에서 만오천 원.
커피 한 잔 5천 원,
생수 한 병 2천 원
만약 통상 23KG의 위탁수하물로 계산하면,
왕복으로 따지면 백만 원이다.
짐이 많고 모든 서비스를 다 이용할 거라면
차라리 FSC가 훨씬 낫지 않을까?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도 없는
얄팍한 등받이에
A4종이 한 장 겨우 들어갈 레그룸 피치를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
랜딩 시그널이 나오고 얼마 후
랜딩 기어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승객 여러분 지금 착륙 장치가 내려왔습니다.
곧 치앙마이에 도착하겠습니다."
순탄한 기류 속에 티웨이 737은 사뿐히
활주에 내려앉았다.
단순한 일자 구조의 공항은 무언가를 찾기 좋다.
요즘은 복잡한 구조 보다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만큼이 좋다. 그 이상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각 건물의 청사를 빠져나오는 데는 20여분이
걸렸다. 공항 택시를 불렀는데 승객 수와 짐의
개수에 따라 마을 원님이 지맘대로 곤장 때릴 수를
정하는 듯했다. 공항 카운터 직원의 250 바트라는
진단서를 들고 게이트 1에 가자 많은 외국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배낭하나 스몰 케리어 하나 씩이나
우리 부부 앞에 카니발 크기의 밴이 멈춰 섰다.
어느 나라든 공항에서 당하는
눈뜨고 코 베이는 일에는
늘 자비로워야 한다.
그냥 세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이웨이에 올라탄 밴은 15분 만에 아지트인
'디콘도 린'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주차장에서 경비 서던 가드에게 사무실을
물었더니 메인 게이트 계단을 통해
관리사무실까지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니나'를 찾습니다.
니나는 오늘 오프예요.
알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키를 맡겼다고 들었어요.
지금 그 키를 주세요.
키에는 단지 내 출입구를 통과하는
신용카드 같이 생긴 카드와
객실문을 여는 스마트카드,
우편함 열쇠 등이 달려 있었다.
손으로 일단 방 문의 키를 터치한 후에
분홍색 스마트 키를 접촉하자 문이 열렸다.
코로나 때문에 와보지도 못한
세컨드하우스의 방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걱정했지만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기뻤다.
생각보다 큰 침실과 화장실이 만족스럽다.
킹 사이즈 베드는 옅은 와인색 시트에 싸여 있었고
침대 맡에는 작은 화장대와 거울이 걸려 있었다.
북향의 집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더운 지방에 있어본 경험에서다.
하루 종일 해를 받는 남쪽 나라의 방은 덥다.
에어컨을 하루 종일 켜 놓아야 한다.
특히 서향은 늦은 오후 주인을 방에서 내쫓을
정도다. 낮아진 각도로 햇빛이 방안을
깊숙이 찌르기 때문이다.
남중고도가 낮아지는 겨울에도 남향집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거기다 겨울도 덥다면
아주 힘들어지는 것이다.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ㄷ' 형태로 생긴 단지의 앞 동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서쪽이 뚫려 있고 멀리 높은 산이 눈에 들어온다.
스마트 폰을 꺼내서 방위를 잡아 보았다.
Heading 020.
ALtitude 312m.
북향에 적당히 높은 지역이다.
그러니 날씨가 안 좋을 수가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영장 타일 위의 푸른 수면 위로 나무에서 떨어진
자주색 보히니아 꽃잎들이 바람에 밀리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더 파아란 물,
그 사이의 자주색 나비날개 같은 꽃잎의 대비는
태국땅이 내뿜는 진한 과일향만큼이나 강렬했다.
그리고 그동안 빼앗긴 것들 중에 하나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코 끝을 스치는 달콤하고
알싸하면서도 또한 끈적한 공기가
폐 속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마치 페브리즈 같이......
난 지금 탈취, 항균이 필요하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본고장의 볶음면에 프릭 남 빠를 한 주먹이라도
뿌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콘도 린'을 벗어나자마자 길 건너에는
세븐일레븐과 커피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코 앞에 편의점과 커피라..... 만세!
디콘도린과 디콘도 싸인 사이에는
폭 3미터가 조금 넘는 긴 골목이 있다.
애니휠이라는 공유 자전거 스테이션도 보인다.
이 골목은 이곳 디콘도에 묶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통로로 센트랄 페스티벌 쇼핑센터로
가는 길이다. 보안을 위해 반키 뭉치에 있는
키카드가 필요하다.
게이트를 키카드로 열고 나면 2 차선
길을 건너 바로 쇼핑몰이다.
방에서 나와 5분이다.
그것도 아주 큰 쇼핑몰이다.
치앙마이 최대몰이라고 한다.
또 만세!
지하층 푸드 코트에서는 정말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곳을 둘러볼 새도 없이 눌러앉았다.
해물 볶음국수와 소고기 볶음면,
그리고 쏨 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성찬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만 원도 안 하는 가격이라니......
만세 만세 만만세!